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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목욕간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5.

오장환 시인 / 목욕간

 

 

내가 수업료를 바치지 못하고 정학을 받아 귀향하였을 때 달포가 넘도록 청결을 하지 못한 내 몸을 씻어보려고 나는 욕탕엘 갔었지

 

뜨거운 물속에 왼몸을 잠그고 잠시 아른거리는 정신에 도취할 것을 그리어보며

나는 아저씨와 함께 욕탕엘 갔었지

 

아저씨의 말씀은 "내가 돈 주고 때 씻기는 생전 처음인걸" 하시었네

 

아저씨는 오늘 할 수 없이 허리 굽은 늙은 밤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가지고 팔러 나오신 길이었네

 

이 고목은 할아버지 열두 살 적에 심으신 세전지물(世傳之物)이라고 언제나 "이 집은 팔아도 밤나무만은 못팔겠다."하시더니 그것을 베어가지고 오셨네그려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오시어 이곳에 한 개 밖에 없는 목욕탕에 이 밤나무 장작을 팔으시었지

 

그리하여 이 나무로 데운 물에라도 좀 몸을 대이고 싶으셔서 할아버님의 유물의 부품이라도 좀더 가차이 하시려고 아저씨의 목적은 때 씻는 것이 아니었던 것일세

 

세시쯤 해서 아저씨와 함께 나는 욕탕엘 갔었지

 

그러나 문이 닫혀 있데그려

 

"어째 오늘은 열지 않으시우" 내가 이렇게 물을 때에 "네 나무가 떨어져서" 이렇게 주인은 얼버무렸네"

 

아니 내가 아까 두시쯤 해서 판 장작을 다 때었단 말이요?" 하고 아저씨는 의심스러이 뒷담을 쳐다보시었네

 

"へ, 實は 今日が市日で あかたらけの田舍っぺ一が群をなして來ますからねえ"

하고 뿔떡같이 생긴 주인은 구격이 맞지도 않게 피시시 웃으며 아저씨를 바라다보았네

 

 "가자!"

 

"가지요" 거의 한때 이런 말이 숙질의 입에서 흘러나왔지

 

아저씨도 야학에 다니셔서 그따위 말마디는 알으시네 우리는 괘씸해서 그곳을 나왔네

 

그 이튿날일세 아저씨는 나보고 다시 목욕탕엘 가자고 하시었네

 

"못 하겠습니다 그런 더러운 모욕을 당하고……"

 

"음 네 말도 그럴듯하지만 그래두 가자" 하시고 강제로 나를 끌고 가셨지

 

[해석]

"へ, 實は今日が市日で あかたらけの田舍っぺ一が群をなして來ますからねえ"

"에, 실은 오늘이 마침 장날이라 땟국물 흐르는 시골뜨기들이 떼지어 몰려들기 때문에"

 

월간 《朝鮮文學(조선문학)》 1933년 11월 등단시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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