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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기림 시인 /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7.

김기림 시인 /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

 

 

  마네킹의 목에 걸려서 까물치는

  眞珠목도리의 새파란 눈동자는

  南洋의 물결에 젖어 있고나.

  바다의 안개에 흐려 있는 파―란 향수를 감추기 위하여

  너는 일부러 벙어리를 꾸미는 줄 나는 안다나.

 

  너의 말없는 눈동자 속에서는

  열대의 태양 아래 과일은 붉을 게다.

  키다리 야자수는

  하늘의 구름을 붙잡으려고

  네 활개를 저으며 춤을 추겠지.

 

  바다에는 달이 빠져 피를 흘려서

  미쳐서 날뛰며 몸부림치는 물결 위에

  오늘도 네가 듣고 싶어하는 獨木舟의 노젓는 소리는

  삐―걱 빼―걱 유랑할 게다.

 

  영원의 성장을 숨쉬는 海草의 자줏빛 산림 속에서

  너에게 키쓰하던 상어의 딸들이 그립다지.

  탄식하는 벙어리의 눈동자여

  너와 나 바다로 아니 가려니?

  녹슬은 두 마음을 잠그러 가자

  土人의 여자의 진흙빛 손가락에서

  모래와 함께 새어 버린

  너의 행복의 조약돌들을 집으러 가자.

  바다의 인어와 같이 나는

  푸른 하늘이 마시고 싶다.

 

  페이브멘트를 때리는 수없는 구두 소리.

  진주와 나의 귀는 우리들의 꿈의 육지에 부딪히는

  물결의 속삭임에 기울어진다.

 

  오― 어린 바다여.

  나는 네게로 날아가는 날개를 기르고 있다

 

1931년 1월 23일 《조선일보》 발표

 

 


 

 

김기림 시인 /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들과 거리 바다와 기업도

  모두다 바치어 새나라 세워가리

  한낱 벌거숭이로 도라가 이나라 지주를 고이는

  다만 쪼약돌이고저 원하던

  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명예도 지위도 호사스런 살림 다 버리고

  구름같이 휘날리는 조국의 기빨아래

  다만 헐벗고 정성스런 종이고저 맹세하던

  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어찌 닭 울기 전 세번 뿐이랴

  다섯 번 일곱 번 그를 모른다하던 욕된 그날이 아퍼

  땅에 쓰러져 얼굴 부비며 끌른 눈물

  눈뿌리 태우던 우리들의 8월.

 

  먼나라와 옥중과 총칼사이를

  뚫고 헤치며 피흘린 열렬한이들 마저

  한갓 겸손한 심부름꾼이고져 빌던

  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끝없는노염 통분속에서 빚어진

  우리들의꿈 이빨로 묻어뜬어 아로새긴 형극

  아무도 따를이없는 아름다운 땅 만들리라

  하늘우르러 외치던 우리들의 8월.

 

  부리는야  부리우는 이 하나 없이

  화혜와 의리와 착한마음 꽃처럼 피어

  천사들 모다 부러워 귀순하는나라

  내 8월의 꿈은 영롱한 보석 바구니

 

  오! 8월로 돌아가자

  나의 창세기 에워싸던 향기는 계절로

  썩은연기 벽돌데미 몬지 속에서

  연꽃처럼 홀란히 피어나던 8월

 

  오!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시집『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36) 중에서

 

 


 

 

김기림 시인 / 氣象圖ㅡ市民行列

 

 

  넥타이를 한 흰 식인종은

  니그로의 요리가 칠면조보다도 좋답니다

  살결을 희게 하는 검은 고기의 위력

  의사 콜베-르 씨의 처방입니다

  헬매트를 쓴 피서객들은

  난잡한 전쟁경기에 열중했습니다

  슬픈 독창가인 심판의 호각소리

  너무 흥분하였으므로

  내복만 입은 파씨스트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설사제는 일체 금물이랍니다

  필경 양복 입는 법을 배워낸 송미령(宋美齡)여사

  아메리카에서는  

  여자들은 모두 해수욕을 갔으므로

  빈집에서는 망향가를 부르는 니그로와

  생쥐가 둘도 없는 동무가 되었습니다

  파리의 남편들은 차라리 오늘도 자살의 위생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하고

  옆집의 수만이는 석달 만에야

  아침부터 지배인 영감의 자동차를 부르는

  지리한 직업에 취직하였고

  독재자는 책상을 때리며 오직

  「단연히 단연히」한 개의 부사만 발음하면 그만입니다

  동양의 아내들은 사철을 불만이니까

  배추장사가 그들의 군소리를 담아 가져오기를

  어떻게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공원은 수상 막도날드 씨가 세계에 자랑하는

  여전히 실업자를 위한 국가적 시설이 되었습니다

  교도(敎徒)들은 언제든지 치울 수 있도록

  가장 간편한 곳에 성경을 얹어두었습니다

  기도는 죄를 지울 수 있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마님 한푼만 적선하세요

  내 얼굴이 요렇게 이즈러진 것도

  내 팔이 이렇게 부러진 것도

  마님과니 말이지 내 어머니의 죄는 아니랍니다」

  「쉿! 무명전사의 기념제행렬(紀念祭行列)이다」

  뚜걱 뚜걱 뚜걱......

 

시집 『氣象圖(기상도)』(장문사, 1936) 중에서

 

 


 

 

김기림 시인 / 氣象圖ㅡ병든 풍경

 

 

  보랏빛 구름으로 선을 둘른

  회색의 칸바쓰를 등지고

  꾸겨진 빨래처럼

  바다는

  산맥의 突端에 걸려 퍼덕인다.

 

  삐뚤어진 성벽 우에

  부러진 소나무 하나……

 

  지치인 바람은 지금

  표백된 풍경속을

  썩은 탄식처럼

  부두를 넘어서

  찢어진 바다의 치마자락을 걷우면서

  화석된 벼래의 뺨을 어루만지며

  주린 강아지처럼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바위틈에 엎디어

  죽지를 드리운 물새 한 마리

  물결을 베고 자는

  꺼질 줄 모르는 너의 향수.

 

  짓밟혀 늘어진 백사장 우에

  매맞어 검푸른 빠나나 껍질 하나

  부프러오른 구두 한짝을

  물결이 차던지고 돌아갔다.

  海邊은 또 하나

  슬픈 전설을 삼켰나보다.

 

  황혼이 입혀주는

  회색의 수의를 감고

  물결은 바다가 타는 장송곡에 맞추어

  병든 하루의 임종을 춘다……

  섬을 부등켜안는

  안타까운 팔.

  바위를 차는 날랜 발길.

  모래를 스치는 조심스런 발꼬락.

  부두에 엎드려서

  축대를 어루만지는

  간엷힌 손길.

 

  붉은 향기를 떨어버린

  해당화의 섬에서는

  참새들의 이야기도 꺼져버렸고

  먼 등대 부근에는

  등불도 별들도 피지 않었다……

 

시집 『氣象圖(기상도)』(장문사, 1936) 중에서

 

 


 

 

김기림 시인 / 氣象圖ㅡ쇠바퀴의 노래

 

 

  허나

  이윽고

  태풍이 짓밟고 간 깨어진 메트로폴리스에

  어린 태양이 병아리처럼

  홰를 치며 일어날 게다

  하룻밤 그 꿈을 건너다니던

  수없는 놀램과 소름을 떨어버리고

  이슬에 젖은 날개를 하늘로 펼 게다

  탄탄한 대로가 희망처럼

  저 머언 지평선에 뻗히면

  우리도 사륜마차에 내일을 싣고

  유량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처음 맞는 새길을 떠나갈 게다

  밤인 까닭에 더욱 마음 달리는

  저 머언 태양의 고향

 

  끝없는 들 언덕 우에서

  나는 데모스테네스보다도 더 수다스러울 게다

  나는 거기서 채찍을 꺾어버리고

  망아지처럼 사랑하고 망아지처럼 뛰놀 게다

 

  미움에 타는 일이 없을 나의 눈동자는

  진주보다도 더 맑은 샛별

  나는 내 속에 엎드린 산양을 몰아내고

  여우와 같이 깨끗하게

  누이들과 친할 게다

 

  나의 생활은 나의 장미

  어디서 시작한 줄도

  언제 끝날 줄도 모르는 나는

  꺼질 줄이 없이 불타는 태양

  대지의 뿌리에서 지열을 마시고

  떨치고 일어날 나는 불사조

  예지의 날개를 등에 붙인 나의 날음은

  태양처럼 우주를 덮을 게다

  아름다운 행동에서 빛처럼 스스로

  피어나는 법칙에 인도되어

  나의 날음은 즐거운 궤도 우에

  끝없이 달리는 쇠바퀼 게다

 

  벗아

  태양처럼 우리는 사나웁고

  태양처럼 제 빛 속에 그늘을 감추고

  태양처럼 슬픔을 삼켜버리자

  태양처럼 어둠을 사뤄버리자

 

  다음날

  기상대의 마스트엔

  구름조각 같은 흰 기폭이 휘날릴 게다


□ 태풍경보해제(颱風警報解除)


쾌청(快晴)

저기압(低氣壓)은 저 머언

시베리아의 근방에 사라졌고

태평양(太平洋)의 연안(沿岸)서도

고기압은 흩어졌다

흐림도 소낙비도

폭풍도 장마도 지나갔고

내일도 모레도

날씨는 좋을 게다


□ 시(市)의 게시판(揭示板)

시민은

우울과 질투와 분노와

끝없는 탄식과

원한의 장마에 곰팽이 낀

추근한 우비일랑 벗어버리고

날개와 같이 가벼운

태양의 옷을 갈아입어도 좋을 게다


시집 『氣象圖(기상도)』(장문사, 1936) 중에서

 

 


 

 

김기림 시인 / 氣象圖ㅡ颱風의 起寢時間

 

 

  바기오의 동쪽

  북위 15도

 

  푸른 바다의 침상에서

  흰 물결의 이불을 차던지고

  내리쏘는 태양의 금빛 화살에 얼굴을 얻어맞으며

  남해의 늦잠재기 적도의 심술쟁이

  태풍이 눈을 떴다

  악어의 싸움 동무

  돌아올 줄 모르는 장거리 선수

  화란 선장의 붉은 수염이 아무래도 싫다는

  따곱쟁이

  휘두르는 검은 모락에

  찢기어 흩어지는 구름발

  거칠은 숨소리에 소름치는

  어족들

  해만(海灣)을 찾아 숨어드는 물결의 떼

  황망히 바다의 장판을 구르며 달린

  빗발의 굵은 다리

  바시의 어구에서 그는 문득

  바위에 걸터앉아 머리 수그린

  헐벗고 늙은 한 사공과 마주쳤다

  흥 `옛날에 옛날에 파선한 사공'인가봐

  결혼식 손님이 없어서 저런 게지

  `오 파우스트'

  `어디를 덤비고 가나'

  `응 북으로'

  `또 성이 났나?'

   `난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자넨 또 무엇 땜에 예까지 왔나?'

  `괴테를 찾아 다니네'

  `괴네는 자네를 내버리지 않았나'

  `하지만 그는 내게 생각하라고만 가르쳐 주었지 어떻게 행동하라군

  가르쳐 주지 않았다네

  나는 지금 그게 가지고 싶으네'

  흠 망난이 파우스트

  흠 망난이 파우스트

  중앙기상대의 기사의 손은

  세계의 1500여 구석의 지소(支所)에서 오는

  전파를 번역하기에 분주하다

 

  제일보(第一報)

 

  저기압(低氣壓)의 중심은

  발칸의 동북

  또는

  남미의 고원(高原)에 있어

  690밀리

  때때로

  적은 비 뒤에

  큰 비

  바람은

  서북(西北)의 방향(方向)으로

  35미터  

 

  제이보(第二報)·폭풍경보(暴風警報)

 

  맹렬한 태풍이

  남태평양상에서

  일어나

  바야흐로

  북진 중이다

  풍우(風雨) 강할 것이다

  아세아의 연안을 경계한다

 

  한 사명에로 편성된 단파·단파·장파·단파·장파·초단파·모―든·전파의 ·동원·

 

  시(市)의 게시판(揭示板)

  `신사들은 우비와 현금을 휴대함이 좋을 것이다'

 

시집 『氣象圖(기상도)』(장문사, 1936) 중에서

 

 


 

 

김기림 시인 / 氣象圖ㅡ세계의 아침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 [스마트라]의 동쪽. …… 5 [킬로]의 해상(海上) …… 일행 감기(感氣)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 시. ……

 

시집 『氣象圖(기상도)』(장문사, 1936) 중에서

 

 


 

 

김기림 시인 / 氣象圖ㅡ자취

 

 

  `대중화민국(大中華民國)의 번영을 위하여―'

  슬프게 떨리는 유리컵의 쇳소리

  거룩한 테―불 보자기 위에

  펴놓은 환담의 물굽이 속에서

  늙은 왕국의 운명은 흔들리운다

  솔로몬의 사자처럼

  빨간 술을 빠는 자못 점잖은 입술들

  새까만 옷깃에서

  쌩긋이 웃는 흰 장미

  `대중화민국(大中華民國)의 분열을 위하여―'

  찢어지는 휘장 저편에서

  갑자기 유리창이 투덜거린다……

 

  `자려무나 자려무나'

  `꽃 속에 누워서 별에게 안겨서―'

  만국공원의 라우드스피―커는

  브람―쓰처럼 매우 슬픕니다

  꽃은커녕 별도 없는 벤취에서는

  꿈들이 바람에 흔들려 소스라쳐 깨었습니다

  하이칼라한 쌘드윗취의 꿈

  탐욕한 비―프스테이ㅋ의 꿈

  건방진 햄살라드의 꿈

  비겁한 강낭죽의 꿈

  `나리사 내게는 꿈꾼 죄밖에는 없습니다

  식당의 문전에는

  천만에 천만에 간 일이라곤 없습니다'

  `……………'

  `나리 저건 묵시록의 기삽니까'

 

  산빨이 소름친다

  바다가 몸부림친다

  휘청거리는 삘딩의 긴 허리

  비틀거리는 전주의 미끈한 다리

  여객기는 태풍의 깃을 피하여

  성층권으로 소스라쳐 올라갔다.

  경련(痙攣)하는 아세아(亞細亞)의 머리 위에 흩어지는 전파의 분수 분수

  고국으로 몰려가는 충실한 에―텔의 아들들

  국무경(國務卿) 양키―씨는 수화기를 내던지고

  창고의 층층계를 굴러 떨어진다

 

  실로 한 모금의 소―다수

  혹은 아무렇지도 아니한 `이늠'소리와 바꾼 증권들 위에서

  붉은 수염이 쓰게 웃었다

  `워싱톤은 가르치기를 정직하여라'

 

  십자가를 높이 들고

  동란에 향하여 귀를 틀어막던

  교회당에서는

  `하느님이여 가나안으로 이르는 길은

  어느 불길 속으로 뚫렸습니까'

  기도의 중품에서 예배는 멈춰 섰다

  아무도 아―멘을 채 말하기 전에

  문으로 문으로 쏟아진다……

 

  도서관에서는

  사람들은 거꾸로 서는 소트라테쓰를 박수합니다

  생도들은 헤―겔의 서투른 산술에 아주 탄복합니다

  어저께의 동지를 강변으로 보내기 위하여

  자못 변화자재(變化自在)한 형법상의 조건이 조사됩니다

 

  교수는 지전 위에 인쇄된 박사논문을 낭독합니다

  `녹크도 없는 손님은 누구냐'

  `………………'

  `대답이 없는 놈은 누구냐'

  `………………'

  `예의는 지켜야 할 것이다'

 

  떨리는 조계선(祖界線)에서

  하도 심심한 보초는 한 불란서 부인을 멈춰 세웠으나

  어느새 그는 그 여자의 스카―트 밑에 있었습니다

  베레 그늘에서 취한 입술이 박애주의자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붕산 냄새에 얼빠진 화류가에는

  매약회사(賣藥會社)의 광고지들

  이즈러진 알미늄 대야

  담뱃집 창고에서

  썩은 고무 냄새가 분향(焚香)을 피운다

 

  지붕을 베끼운 골목 어구에서

  쫓겨난 공자님이 잉잉 울고 섰다

  자동차가 돌을 차고 넘어진다

  전차가 개울에 쓰러진다

  삘딩의 숲 속

  네거리의 골짝에 몰켜든 검은 대가리들의 하수도

  멱처럼 허우적이는 가―느다란 팔들

  교수 대신에 허공을 붙잡은 지치인 노력

  흔들리우는 어깨의 물결

 

  불자동차의

  날랜 사이렌의 날이

  선뜻 무딘 동란을 가르고 지나갔다

  입마다 불길을 뿜는

  마천루의 턱을 어루만지는 분수의 바알

 

  어깨가 떨어진 마르코 폴로의 동상이 혼자

  네거리의 복판에 가로서서

  군중을 호령하고 싶으나

  모가지가 없습니다

 

  라디오 비―큰에 걸린

  비행기의 부러진 죽지

  골짝을 거꾸로 자빠져 흐르는 비석의 폭포

  `소집령도 끝나기 전에 호적부를 어쩐담'

  `그보다도 필요한 납세부'

  `그보다도 봉급표를'

  `그렇지만 출근부는 없어지는 게 좋아'

 

  날마다 갈리는 공사(公使)의 행렬

  승마구락부의 말발굽 소리

  홀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자동차의 고무바퀴들

  묵서가행(墨西哥行)의 쿠리들의 투레기

  자못 가벼운 두 쌍의 키드와 하이힐

  몇 개의 세대가 뒤섞이어 밟고 간 해안의 가도는

  깨어진 벽돌 쪼각과

  부서진 유리 쪼각에 얻어맞아서

  꼬부라져 자빠져 있다

 

  날마다 황혼이 채워 주는

  전등의 훈장을 번쩍이며

  세기의 밤중에 버티고 일어섰던

  오만한 도시를 함부로 뒤져 놓고

  태풍은 휘파람을 높이 불며

  황하강변(黃河江邊)으로 비꼬며 간다……

 

시집 『氣象圖(기상도)』(장문사, 1936) 중에서

 

 


 

 

김기림 시인 / 겨울의 노래

 

 

 망또처럼 추근추근한 습지기로니

  왜 이다지야 태양이 그리울까

  의사는 처방을 단념하고 돌아갔다지요

  아니요 나는 인생이 더 노엽지 않습니다

 

  여행도 했습니다 몇 낱 서투른 러브씬―무척 우습습니다

  인조견을 두르고 환(還)고향하는 어사또(御史道)님도 있습디다

  저마다 훈장처럼 오만합니다 사뭇 키가 큽니다

  남들은 참말로 노래를 부를 줄 아나배

  갈바람 속에 우두커니 섰는 벌거벗은 허수아비들

  어느 철없는 가마귀가 무서워할까요

  저런 연빛 하늘에도 별이 뜰 리 있나

  장미가 피지 않는 하늘에 별이 살 리 있나

 

  바람이 떼를 지어 강가에서 우짖는 밤은

  절망이 혼자 밤새도록 내 친한 벗이었습니다

  마지막 별이 흘러가도 아무도 소름치지 않습니다

  집마다 새벽을 믿지 않는 완고한 창들이 잠겨 있습니다

 

  육천년 메마른 사상의 사막에서는 오늘밤도

  희미한 신화의 불길들이

  음산한 회의의 바람에 불려 깜박거립니다

 

  그러나 사월이 오면 나도 이 추근추근한 계절과도 작별해야 하겠습니다

  습지에 자란 검은 생각의 잡초들을 불사뤄 버리고

  태양이 있는 바닷가로 나려가겠습니다

  거기서 벌거벗은 신들과 건강한 영웅들을 만나겠습니다.

 

시집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중에서

 

 


 

김기림[金起林, 1908. 5.11 ~?]시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출생.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대학을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어영문과 졸업.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 1. 23) ·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 10.) ∙ 〈고대(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 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 1. 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  문학 활동은 九人會(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남아 있음.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창자고가 비평에서 두루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다소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도 했음.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됨. 대표 저서로는 시집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고,  비평 및 이론서로『문학개론』, 『시론』, 『시의 이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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