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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용철 시인 / 떠나가는 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7.

박용철 시인 /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안윽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가치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뫼ㅅ부리 모양

  주름쌀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닛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도라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네.

  압 대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잇슬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박용철전집, 시문학사, 1939

 

 


 

 

박용철 시인 / 싸늘한 이마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燐光)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박용철전집, 시문학사, 1939

 

 


 

 

박용철 시인 / 이대로 가랴마는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판 하늘에 사라져 버리는 구름쪽같이

 

조그만 열로 지금 수떠리는 피가 멈추고

가는 숨길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아-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 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 내리네


박용철전집, 시문학사, 1939

 

 


 

 

박용철 시인 / 비나리는 날

 

 

  세엄도 업시 왼하로 나리는 비에

  내 맘이 고만 여위어 가나니

  앗가운 갈매기들은 다 저저 죽엇겠다 

 

박용철전집, 시문학사, 1939

 

 


 

 

박용철 시인 /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1.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부인 듯 한 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 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멀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2.

  밖을 내어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도 설으렷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비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렸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렷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렷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3.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같이 어둠을

  헤쳐 나가는 너.

  약한 정 후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아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4.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멀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 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아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 보리라.

 

월간 『시문학』 1930년 3월호(창간호) 발표

 

 


 

박용철 [朴龍喆, 1904.6.21~1938.5.12] 시인

1904년 광주 광산(光山) 출생. 호는 용아(龍兒).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도일,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거쳐서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연희전문(延禧專門)에 입학, 수개월 후에 자퇴하고 문학에 전념. 1930년에 김영랑(金永郞)과 함께 《시문학(詩文學)》을 창간, 이 잡지 1호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

《시문학》에 이어 《문예월간(文藝月刊)》 《문학》 등을 계속해서 발간하고 시와 함께 많은 번역시, 그리고 인형의 집」을 비롯하여 「빈의 비극」, 「베니스의 상인」 등의 희곡을 번역. 1931년 이후로는 비평가로서도 크게 활약하여 「효과주의 비평논강(效果主義批評論綱) 」,  「조선문학의 과소평가」,  「시적 변용(詩的變容)에 대하여」 등을 발표,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배격하여 임화(林和)와 논전을 벌임. 사후 1년 만에 《박용철 전집》(전2권)이 간행되었으며, 2001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수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