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명 시인 /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 ㅡ 보들레르에게
오 ! 님이여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찬 이슬에 붉은 꽃물에 젖은 당신의 가슴을 붉은 술과 푸른 아편에 하염없이 웃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또 당신의 혼의 상흔(傷痕)에서 흘러 내리는 모든 고운 노래를
오 ! 님이녀 나는 당신의 나라를 믿습니다. 회색의 두꺼운 구름으로 해와 달의 모든 보기 싫은 고혹(蠱惑)의 빛을 뒤덮어 버리고 정향(定向)없이 휘날리는 낙엽의 난무 밑에서 그윽한 정적에 불꽃 높게 타는 강한 리듬의 당신의 나라를 마취와 비장(悲壯) 통열(痛悅)과 광희(狂喜) 침정(沈靜)과 냉소 환각(幻覺)과 독존(獨尊)의 당신의 나라 구름과 물결 백작(白灼)과 정향(精香)의 그리고도 오히려 극야(極夜)의 새벽빛이 출렁거리는 당신의 나라를 오 ! 님이여 나는 믿습니다.
님이여 ! 내 그립어하는 당신의 나라로 내 몸을 받읍소서. 실비린내 요란한 매혹의 몸도 시의(屍衣)에 분망하는 상가집 같은 가을도 님 계신 나라에서야 볼 수 없겠지요.
오직 눈자라는 끝까지 높이 쌓인 흰 눈과 굵다란 멜로디에 비장하게 흔들리는 현훈(眩暈)한 극광(極光)이 두가지가 한데 어울려져서는 백열(白熱)의 키스가 되며 사(死)의 위대한 서곡이 되며 푸른 웃음과 검은 눈물이 되며 생과 사로 씨와 날을 두어 짜내인 장미빛 방석이 되어 버림을 당한 곤비(困憊)한 혼(魂)들에 여읜 발자욱을 지키고 있는 님의 나라로 오 ! 내 몸을 받읍소서.
살뜰한 님이여 !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는) 그리고 또 철회색(鐵灰色)의 두꺼운 구름으로 내 가슴을 덮어 주실 것이면 나는 님의 번개 같은 노래에 낙엽같이 춤추겠나이다.
정다운 님이여 ! 당신이 만약 문을 열어 주시면 (당신의 전당[殿堂]으로 들어가는) 그리고 또 당신의 가슴에서 타는 정향(精香)을 나로 하여금 만지게 할 것이면 나는 님의 바다 같은 한숨에 물고기같이 잠겨 버리겠나이다.
님이여 ! 오 ! 마왕(魔王)같은 님이여 !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 (당신의 밀실로 들어가는) 그리고 또 북극의 오로라 빛으로 내 몸을 쓰다듬어 줄 것이면 나는 님의 우렁찬 웃음소리에 기분 내어 눈 높이 쌓인 곳에 무덤을 파겠나이다.
월간 『開闢(개벽)』 1923년 10월호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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