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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홍사용 시인 / 백조(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0.

홍사용 시인 / 백조(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저­기 저 하늘에서 춤추는 저것은 무어?

  오­금빛 노을!

  나의 가슴은 군성거리며 견딜 수 없습니다

  앞 강에서 일상(日常) 부르는 우렁찬 소리가

  어여쁜 나를 불러냅니다.

  귀에 익은 음성이 머얼리서 들릴 때에

  철없는 마음은 좋아라고 미쳐서 잔디밭 모래톱으로 줄달음칩니다.

 

  이러다 다리 뻗고 주저앉아서 일없이 지껄입니다.

  은(銀) 고리같이 동글고 매끄러운 혼자 이야기를,

  상글상글하는 태백성(太白星)이 머리 위에 반짝이니,

  벌써 반가운 이가 반가운 그이가 옴이로소이다

  분(粉) 세수한 듯한 오리알빛 동그레 달이

  앞 동산 봉우릴 짚고서 방그레­ 바시시 솟아오리며,

  바시락거리는 깁 안개 위으로 달콤한 저녁의 막(幕)이

  소리를 쳐 내려올 때에 너른너른하는

  허­연 밀물이 팔 벌려 어렴풋이 닥쳐옵니다.

 

  이때 올시다. 이때면은 나의 가슴은 더욱더욱 뜁니다.

  어두운 수풀 저쪽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무서워 그럼이 아니라 자글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넌지시 낯 숙여 웃으시는 그이를

  풋여린 마음이 수줍어 언뜻 봄이로소이다.

 

  신부(新婦)의 고요히 휩싸는 치맛자락같이

  달 잠겨 떨리는 잔살 물결이 소리없이 어린이의 신흥(新興)을

  흐느적거리니 물고기같이 내닫는 가슴을 걷잡을 수 없어

  물빛도 은(銀) 같고물소리도 은(銀)같은 가없는

  희열(喜悅) 나라로 더벅더벅 걸어갑니다 .

  미칠듯이 자지러져 철철 흐르는 기쁨에 뛰여서­.

 

  아­ 끝없는 기쁨이로소이다.

  나는 하고 싶은 소리를 다 불러봅니다.

  이러다 정처(定處) 없는 감락(甘樂)이 온몸을 고달프게 합니다.

  그러면 안으려고 기다리는 이에게

  팔 벌려 안기듯이 어릿광처럼 힘없이 넘어 집니다.

 

  옳지 이러면 공단(貢緞) 같이 고운 물결이

  찰락찰락 나의 몸을 쓰담아 주노나!

  커다란 침묵은 길이길이 조으는데 끝없이 흐르는

  밀물 나라에는 낯익은 별하나가 새로이 비췹니다.

  거기서 웃음 섞어 부르는 자장노래는

  다소이 어리인 금빛 꿈터에 호랑나비처럼 훨훨 날아 듭니다.

 

  어쩌노! 이를 어쩌노 아­어쩌노!

  어머니 젖을 만지 듯한 달콤한 비애(悲哀)가

  안개처럼 이 어린 넋을 휩싸들으니.

  심술스러운 응석을 숨길 수 없어 아니한 울음을 소리쳐 웁니다.

 

 


 

 

홍사용 시인 / 꿈이면은

 

 

  꿈이면은 이러한가,

  인생이 꿈이라니

  사랑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허튼 주정(酒酊)

  아니라, 부숴 버리자,

  종이로 만든 그까짓 화환(花環)

 

  지껄이지 마라,

  정 모르는 지어미야

  날더러 안존(安尊)치 못하다고?

  귀밑머리 풀으기 전(前) 나는

  그래도 순실(純實) 하였었노라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모두 아가 것이라고

  내가 어릴 옛날에 어머니께서

 어머니 눈이 끔적하실 때,

   나의 입은 벙긋벙긋

  어렴풋이 잠에 속으며,

  그래도 좋아서

  모든 세상이 이러한 줄 알고 왔노라.

 

  속이지 마라, 웃는 님이여

  속이지 마라,

  부디 나를 속이지 마라.

  그러할 터면, 차라리 나를

  검은 칠관(漆棺)에다 집어 넣고서

  뾰족한 은정(銀釘)을,

  네 손으로 처박아 다오

 

  내나 너를 만날 때까지는

  또 만날 때면은,

  순실(純實) 하였었노라

  입을 맞추려거든,

  나의 눈을 가리지 마라.

  무엇이든지 주면은,

  거저 받을 터이니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의심(疑心) 케 마라

  또 간사(奸詐)에 들게 마라.

 

  그리고, 온갖 소리를 치워 다오

  듣기 싫다.

  회색창(灰色窓) 뒤에서

  철벅거리는 목욕(沐浴) 물 소리

  내가 입을 다무랴, 입을 다물어?

  속고도, 말 못하는 이 세상이다

  억울하고도,

  말 못하는 이 세상이다

 

  내가 터 닦아 놓은 꽃밭에

  어른어른하는 흰 옷은, 누구?

  놀래어 도망하는 시악시 사랑아

  오이씨 같은 어여쁜 발아

  왜, 남의 화단(花壇)을,

  무너뜨리고만 가느뇨

 

  뭉뜯어 내버린 꽃송일

  주섬주섬 주워담자

  임자가 나서거든 던져 주려고

  앞산의 큰 영(嶺)을 처음 넘어서

  낯모르는 마을로 찾아나 가자

 

  퇴금색(褪金色)의 옷 입은

  여왕의 사자(使者)가

  번쩍거리는 길가에, 나를 붙들고

  동산의 은빛 달이 동그레 돋거든

  여왕궁(女王宮)의

  뒷문으로 중맞이 오라면

  옳지 좋다, 좀이나 좋으랴.

 

  생전(生前)에 처음

  좋은 천진(天眞)의 내다

  그러나 그러나, 이 어린 손으로

  초연(初戀)의 붉은 문을 두드릴 때에

  꿈에나 뜻했으랴, 뜻도 아니한

  무지한 문지기의 성난 눈초리

  그래도 나는, 거침없이 말하겠노라.

  이 꽃의 임자는, 우리 님이시다

 

  그러나 꽃을 받을 어여쁜 님아

  어데로 갔노? 어데로 갔노?

  한 송이 꽃도 못다 이뻐서

  들으나, 그는 무덤에 들었다

  님의 무덤에 가자마자

  그 꽃마저 죽노나!

  그 꽃마저 죽노나!

 

  그 꽃마저 죽자마자

  날뛰는 이 가슴도

  시들시들 가을 바람

  아! 이게 꿈이노?

  이게 꿈이노!

  꿈이면은,

  건넛산 어슴푸레한 흙구덩이를

  건너다보고서,

  실컷 울었건마는

  깨어서 보니,

  거짓이고 헛되구나,

  사랑의 꿈이야.

 

  실연(失戀)의 산기슭 돌아설 때에

  가슴이 미어지는 그 울음은

  뼈가 녹도록 아팠건마는

  모질어라 매정하여라

  깨어서는,

  흐르는 눈물 일부러 씻고서

  허튼 잠꼬대로 돌리고 말고녀.

 

월간 『백조(白潮)』 1922년 1월(창간호) 발표

 

 


 

홍사용 시인[洪思容, 1900.5.17~1947.1.7]

1900년 수원(水原: 현재의 화성시)에서 출생. 호는 호는 노작(露雀).  휘문의숙(徽文義塾) 졸업.1922년 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 등과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향토적이며 감상적인 서정시를 발표.

신극운동(新劇運動)에도 참여하여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이끌었고 희곡도 썼음. 시·수필·희곡 등 발표 작품은 많지만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은  없고  폐병으로  세상을 떠남. 2002년 노작문학상이 제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