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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나 시인 / 빠지지 않는 반지
내 금반지 안에서는 가끔 둥근 달이 떴다. 이 세상 모든 둥근 것들이 차례로 내 반지 속으로 들어와선 금테를 두르고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금빛 둘레를 돌고 도는 씨앗들의 행보 수평 교량이라는 고정 설계를 유쾌하게 깨뜨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씨앗들이 올라간다 내려간다 나무 꼭대기 과육 속으로, 땅 밑 무덤 속으로 이 상승과 하강의 순환고리, 마침내 하나의 길에서 빛살이 새어나오는, 어느 때는 내 반지가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그럴지라도 내 반지에서 인연의 질긴 끈을 끊고 새 한 마리 날개를 펼칠 수 있을는지 땅에 와 닿기까지, 하늘에 가 닿기까지 훨훨 날 수 있을는지… 살쪄가는 내 무명지는 날마다 견고한 황금 울타리 안에 갇혀 탈출을 꿈꾼다 빠지지 않는 생 손가락으로
그러니 원의 입구와 탈출구를 찾는 일 어쩌면 이 두 개의 문이 하나일지도 모르는 그 하나의 문으로 가는 일, 아니 단순히 반지에서 손가락을 빼내기 위해서는 반지를 깨부수는 거다 그러나 동강날 수 없는 반지이므로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그래!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몰라, 0에서마저 빠져나와 아름다운 슬픔 하나 누더기로 걸치고 있는 사람, 살찐 무명지를 잘라버린.
김길나 시인 / 벌레들의 밤
해가 지는 거리에서 새들도 서둘러 둥지로 돌아들가는구나 집이 다르므로 길이 다른 귀가길 돌아갈 곳과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우며 안개가 나의 정강이뼈에까지 차오를 때 해 떨어진 구멍마다에 끈적한 분비물이 고이고 스멀스멀 벌레들이 기어나온다 집합한다 경주한다 결합한다 눈부셔라. 꽃뱀등허리처럼 느글거리는 이 일련의 파동, 붉은 모스크바의 광장에서도 빵이 이념의 기氣를 꺾은 돌풍 나의 이 갑작스런 연상은 아마 구멍에서 치밀고 나오는 벌레들의 현란한 불꽃 때문일 거야 꺼질 줄 모르고 마지막까지 남아 뻗치는 머리카락에도 불을 놓는 저 목쉰 만세소리 때문일 거야 그리고 지금 애욕이 폭발하는 합궁 속에서 바글대는 벌레들 미지의 생명 세계로 진입하려는 우주여행이 치열한데 황홀한 폭포수에는 죽음의 광기가 번득인다 정충들이 꼬리에 별 하나씩을 달고 목숨을 던져 뛰어내리는, 등골 서늘한 폭포 끝에서 살아남은 벌레들이 혼자씩 길을 찾아 숨 가쁘게 달려간다 달려온다
우리는 알고 있지 결국 이것들이 얼굴을 바꾸고 땅 밑까지 쫓아오리라는 것을, 식어버린 내 육신을 야금야금 맛있게 파먹는 구더기들을 미리 보고 있는 중이니까 이 거대하고 위대한 벌레집
김길나 시인 / 몸 안의 길
1
신열로 벌겋게 달아오른 이 길이 벌떡 일어서기라도 하면 나무들이 나자빠지고 사람들도 쓸어지겠지- 이렇게 방정스레 중얼거리다가 나는 인파 속에서 넘어졌어 무너지는 햇빛 한 무더기에 치여
2
나는 아픈 옆구리를 움켜쥐고 초음파실에 누웠다 초음파는 내 몸의 뚫린 길을 촬영한다 모니터 화면에 떠오르는 낯선 오지奧地 내 몸 안에서 시내 치는 실핏줄 개울물가에 반쯤 눈을 감은 젊은 별이 환히 웃고 있어 핏물 고인 응달에 피어난 영산홍의 붉은 상처다발을 씻어 누이고 넘어오는 물살 목숨의 오랜 강줄기는 그렇게 살 밑에서 길을 내고, 비릿한 심장 곁에서 반짝 눈을 뜬 달덩이 불끈 솟아올라 배꼽 속에 숨은 바다를 불러낸다 수 많은 모세혈관을 지나 대동맥에서 터져나오는 첫 새벽바다 내 몸 안에서 몇 억만 년 전의 물고기들이 살아나 등 푸르게 퍼덕인다 떼지어 지나가는 길
김길나 시인 / 마술사 7 -장막
마술사의 수상한 장막에 대하여 그것에 현혹되는 나의 착시에 대하여 그러므로 눈을 떠야 하나 감아야 하나 난감해하면서, 그럴수록 장막 뒤편이 궁금해졌다
불그레하게 불빛 환한 장막 뒤에서 마술사의 손은 온갖 신기한 마술을 끄집어낸다. 안 감춘 듯 감추고 꺼내지 않고 꺼내는 고도로 훈련된 묘한 기술을 할 수만 있다면 배워두는 게 좋겠어 일상이 시들어질 때 고정된 울타리를 걷어 비밀스런 베일로 바꾸고 감추는 일…… 감춘 알톨박이 하나쯤 군불 지핀 몸 속 단전의 불씨 안에 묻어두고 잘 익혔다가 어느 새벽 귤빛 노을 몇 가닥 걸치고 동녘을 향해 짱! 하고 내놓는 일
우선 해에게로 가 해의 웃음이 되는 나무에게 가서는 나무가 되는 그런 마음의 묘기를 보여주는 거…(다) 실상 엿볼 수도 없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비밀 장막, 그 뒤편을 궁금해 하지만 (그러고 보면 마술사는 참 멋쟁이야)
1996년 《문학과 사회》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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