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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영수 시인 / 시칠리아의 암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6.

한영수 시인 / 시칠리아의 암소

 

 

불 켜진 창문은 함께 혼자다 서로에게 배경일 뿐이라는 듯 501호 무심히 어두워진다

모래의 말이 서걱거린다

황사는 너의 봄과 거리 위에

지친 꿈의 이마 위에 내려쌓인다

좁은 방은 사막으로 이동한다

 

너는 눈에 띄지 않는다 조금 더 네가 되어간다

연달아 모래언덕을 돌았다 소금밭을 건넜다

너에게 당도하기 위해

길을 잃는다 돌고

돌면서 다시 도는 눈 먼 그림자

첫별이 뜰 때 길을 나섰고 첫별이 지는 우물가에 돌아가지 못한다 걸어도 걷지 않아도 불멸인 사막은 낙타만이 배반할 수 있을까 순간 무릎을 꺾을 수 있을까 진물 고인 눈썹 사이 지평선의 종려잎이 아주 빛나고 외봉낙타는 끌고 온 정든 그림자를 삼킨다지

 

어떤 죽음에 제를 올리고 회오리쳐 이 황사는 오나

풀 꽃 나비 아름다운 이름을 차례로 지우며 사막의 신화를 중얼거린다

누런 바람이 돌려세우는 모래 산

끄덕끄덕 너는 기어오른다

모래산은 청동암소를 닮아서

손이 발이 된다 점점 모래 속에

갇힌다 밤새

까매졌다

하얘졌다

긁히고

덧나고

코로 스미는 진땀 냄새 눈물 냄새 가만,

노래가 입술을 빠져나오기 직전

 

비명이 음악을 만드는 그런 때가 있다

만 리 밖 고대의 슬픈 은유를 너는 알고 있다


  

 


 

 

한영수 시인 / 달려라 덩굴

 

 

  수산연립도 수산팰리스로 키를 높인다

  골목이 한 뭉텅이 또 사라지는 오래된 골목 끝

  호박덩굴은 설 자리가 없다

  사람냄새 두리번거리다

  한눈파는 개똥 사이로 고개를 들이민다

  진양조로 햇살을 부른다

  중중모리로 거름냄새 오무렸다 편다

  천 개의 숨은 발이 긴 그림자 안차게 끌고

  꺾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꾼의 호흡이다

  오월이 피고 지도록 눈 침침한 가장자리

  한 다발의 남풍과 여우비도 엮어 조막손은

  초록 마실 길을 놓는다

  달거리약수터 가락에 앉아

  수산연립 할머니들의 조각 밭 경계를 허문다

  비탈에 뻐드렁니처럼 어긋난 세모 마름모와 어깨동무 하고

  휘모리로 가시덤불 산찔레를 품는다

  단 하나의 매듭도 짓지 않고 더운 입김은

  북북서로 허리를 튼다 오솔길에 접속한다

  스님이 늙어 오동나무도 잘 늙은 작은 절

  황금분할을 의식하여 바닥에 치우친 울타리를 오른다

  오동꽃 높은 보라 깜박, 졸음에 한 판 대갈받이도 벼르지만

  빈속이다 호박덩굴 막다른 벼랑을 미끄럼 탄다

  쫓기는 발자국에도 꽃 순은 왜 구성지게 치솟는지

  난간을 뒤덮으며 판을 벌인 호박꽃

  저녁 쇠북소리 추임새는 더디고

 


  


 

 

한영수 시인 / 연금술사

 

 

   이럴 때 통증은 한 걸음 달아나면 한 걸음 더 팽팽해진다

   생단(牲壇)의 동아줄은

   풀어놓아도 멀리는 못갈 짧은 앞다리 왼쪽을 친친 감고 있다

   가마솥 아궁이엔 고운 장작불

   무엇하러 갈색 털은 윤을 냈을까

   꾹 다문 긴 주둥이

   꿀꿀 울지는 않고

   걷고 달리던 뒷다리로 생각의 뒤까지 파헤쳐본다

   선지처럼 전후좌우가 엉겨붙는다

   김 오르는 가마솥 한 번 쳐다보고 마른 침 한 번 삼키고 설핏,

   웃비 걷히는 골짜기 이내보다 앞질러 빠져나갈 것도 같은데

   샛바람이 온다

   툭툭 장작개비가 속도를 높인다

   도포자락 펄럭이며 다르면서고 같은 얼굴들이

   순서대로 사당의 돌계단을 오른다

   동아줄도 묶을 수 없는 눈빛

   희고 멀리 생단의 침묵을 감싼다 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두 개의 발톱을 세워

   노래하고 꿈꾸는 한창에서 바늘을 멈춘다

   스스로 벼랑이 된다

   높이도 폭도 없이 뛰어내린다

   한 벼랑의 고독이 끓어오르며

 

   제상 위 돼지머리

   비스듬히 웃었다 금빛이다

 

 

 


 

 

한영수 시인 / B612

 

 

  아홉 살 아침

  운동장의 박동소리는 연두다

 

  봄을, 여름 가을을 무시한 그 애의 옷은 갈색

  햇볕에 그을린 피부 같은 옷을 입고

  그 애는 공을 찬다 운동장에서

  나를 보는 것은 아니고 다른 애를 보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그 애의 눈길은 공을 쫓아 나아가고 있으나 멈춰 있고

  멈춰 있으나 사방을 헤매고 있다

  발그레 달아오른 손톱자국 많이 패인 두 뺨은

  눈길들 너머 한 곳 소실점을 향하고 있다

  먼 곳으로부터 데려온 침묵은 그러면서도 가까이

  누군가의 말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복도에서 한 보자기 정오의 햇빛 안에서 나는

  그 애의 몸에 얼어붙은 두 발을 본다

  몸이 놔주지 않는다는 듯 꽉 붙은 발은

  그러나 왼발이 조금 밖으로 내밀어져 있다

  등 뒤에서 우리가 고아라고 불렀던

  불뚝, 추운 그 발에 걸려 나는 넘어진다

 

  말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아 우리가

  봄 나무의 연두로 우주와 내통하던

  어린왕자 소혹성 무렵

 

2010년 《서정시학》 등단시

 

 


 

한영수 시인

2010년 《서정시학》에 〈시칠리아의 암소〉 외 3편을 발표하며 문단활동 시작. 시집으로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가 있음. 2005년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창작기금 수혜. 2015년 세종문학나눔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