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유정 시인 / 킬리만자로의 표범
외따로 떨어진 봉우리 아무색도 없는 구름과 바다와 얼음의 산. 흰 눈을 따라다니는 유일한 무늬, 말라죽은 사체처럼 만년설의 겁먹은 눈알이 얼어 있다.
만년설 속에는 표범의 눈이 있다.
아래는 절대보지 않겠다는 눈, 맑은 날 구름 속에서 눈을 뜨는 햇빛. 설산의 북벽 어디쯤 눈 녹을 때 제일 먼저 눈알이 녹는다. 눈물은 오래전에 아주 먼 곳의 낮은 곳으로 흘렀다.
숨을 쉴 때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는 듯 거친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귀는 달처럼 둥글었고 짧은 다리는 벼랑 끝에 피는 꽃잎을 닮았다.
눈 쌓인 설산의 햇살 같은 꼬리는 길었다. 발자국은 쉽게 녹지 않은 눈만 골라 다니고 산을 돌아나가는 태양을 눈알로 넣고 다녔다.
달의 표면 같은 배. 지상의 가장 높은 곳에 제 눈알을 묻어 놓고 잠든 표범.
눈 아래 선처럼 말할 수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밀려와 눈언저리가 뜨거워졌다. 눈 무더기는 적도의 햇살 받아 반짝거렸고 눈이 부셔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시집『그늘이 말을 걸다』(문학의숲, 2016) 중에서
장유정 시인 / 바람의 책
해안선을 따라 길게 방풍림이 푸르다. 바람의 페이지는 이쯤에서 맨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열매들은 시어지다 종래에는 짠 계절에 들고 바람의 마침표에는 흔들리는 씨가 많다.
이곳 반달모양의 그늘에 들어 휘어지는 등과 펄럭이는 잎을 얻어가는 물고기들 그럴 때마다 물의 페이지는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부서지고 말라 어느 족적이 읽고 지나간 흔적이 묻어 있다 물기가 날아간 문장 비릿한 바람이 돌아다니는 숲엔 하현모양의 부레가 있는 큰 어족이 늙은 풍문으로 산다.
도무지 시끄러운 책이다 파도의 대목에서는 돌 구르는 소리가 부풀어 있다 어깨에 돌아다니는 비린 통증이 있고 뒤척이는 어선들 마을의 노인들에겐 돌아눕는 민간요법이 있어 바람 이전에 가서 서성인다.
저항엔 날아오르는 소리가 있다. 바람이 소멸하는 순간을 보고 싶다면 이곳에 와서 몸을 구부리고 기다리면 된다. 길 잃은 것들이 길을 흔드는 걸 본다.
가라앉은 곳에서 떠오르는 부력은 없다지만 이곳 숲에선 가라앉은 바람이 날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람이 끝나는 곳. 늙은 바람이 떨어지기도 하는 곳. 바람의 그늘에 고기 떼가 몰려든다.
떨어진 글자들을 주워 물고기 눈으로 읽는 달이 환하다.
시집『그늘이 말을 걸다』(문학의숲, 2016)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유석 시인 / 놀이의 방식 외 1편 (0) | 2019.06.06 |
|---|---|
| 김선향 시인 / 여독 외 1편 (0) | 2019.06.06 |
| 한영수 시인 / 시칠리아의 암소 외 3편 (0) | 2019.06.06 |
| 여성민 시인 / 불완전성의 정리 (0) | 2019.06.06 |
| 김성춘 시인 / 신라 이야기.1 (0) | 2019.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