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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찬일 시인 / 닭인가 토끼인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2.

박찬일 시인 / 닭인가 토끼인가?

 

 

저 게 닭장인가 토끼장인가? 그것을 덮고 있는 두꺼운 모직 담요. 누가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 그것밖에 그것밖에 없는

 

인생(人生), 닭장인가 토끼장을 열고 그 위에 덮인 두꺼운 담요를 벗기려 하고 있다.

 

담요는 벗겨지지 않는다. 토끼장인가 닭장은 열린 곳이 아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계속 난다. 그림자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담요를 벗기려고 하고 문을 열려 한다. 모두 잊은 곳에서

 

내가 담요를 거들어주려고 한다. 닭장인가 토끼장 문을 열려고 한다. 햇빛 아래 닭인가 토끼를 마주하려고 한다.

 

닭인가 토끼? 도대체 토끼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닭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격월간 『시와 표현』 2019년 3~4월호 발표

 

 


 

 

박찬일 시인 / 두 마리의 사람

 

 

사람 속에 개가 있다.

개가 나서기도 하고

사람이 나서기도 한다.

 

개와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개 속에 사람이 있는 경우도 만나지 못한다.

 

개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람이 개가 되기도 하나

함께 있지 못한다.

개로 사람을 방문하지 못하고

사람으로 개를 방문하지 못한다.

별개라는 말이다.

 

개에 대한 기억도 없고 사람에 대한 기억도 없다.

별개의 방에서 개는 개를 추억하고

사람은 사람을 추억한다.

 

죽어서 하나가 되지만 개였던 줄 모르고

사람이었던 줄 모른다.

개로 죽으면 갠 줄 알고 사람으로 죽으면 사람으로 안다.

개와 사람이었던 줄 모른다

 

시집 『아버지 형이상학』(예술가, 2017) 중에서

 

 

 


 

박찬일 시인 / 초록 무덤

 

 

무덤이 빙산의 일각이란다.

거대한 무덤이란다, 지구가.

 

무덤 위에 무덤이, 무덤 위에 무덤이

쌓이고 쌓여,

 

단단해졌단다. 동글동글해졌단다.

초록 풀이 입혀졌단다.

 

바다가 무덤 아닌가요? 죽은 자를 물에 타서,

죽은 자에 죽은 자를 타서,

초록빛을 내는.

 

그렇단다. 그래 지구가 초록이란다.

초록무덤이란다.

 

시집 『모자나무』(민음사, 2006) 중에서

 

 

 


 

박찬일 시인

춘천에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에 시 「무거움」 「갈릴레오」 등 8편 발표하며 등단. 연세대학교 독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일 카셀대학에서 수학(박사후과정). 1974년 이낙봉-양승준과 동인사화집 『너희들』 간행. 저서로는 시집으로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인류』, 『북극점』 수정본, 시론집으로 『해석은 발명이다』, 『사랑, 혹은 에로티즘』, 『근대: 이항대립체계의 실제』, 『박찬일의 시간 있는 아침』, 『시의 위의─알레고리』, 연구서로 『독일 대도시시 연구』, 『시를 말하다』, 『브레히트 시의 이해』 등이 있음. 박인환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