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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서빈 시인 / 달의 이동 경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7.

이서빈 시인 / 달의 이동 경로

 

 

첫 이마를 숙인 밤하늘에 생채기난 달 하나가 떠있다. 고원의 순례자들은 출발할 때 이마에 달 하나를 챙겨간다. 그 밝기로 험로를 5체 투지로 간다. 이마가 땅에 닿을 때 마다 신들은 따끔따끔거릴것같다. 이마가 헐고, 조금씩 상처가 나 오래된 표시로 딱지가 앉는다. 거뭇한 이마에 굳은살로 뜬 붉은달.

 

티벳 여행길에서 5체 투지를 하며 가는 순례자를 만났다. 몇 달 며칠을 이마에 달띄우며 간다. 달은 언제나 찬란한 가난을 닮았다. 한동안 배고프고 또 한동안 배부르다 다시 배고픈 달. 장엄한 사육제다. 태어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거듭나기를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닥을 함께 기는 그림자 푸른밤. 살 다 내리고 채우기를 몇 번 함께 기는 그림자의 눈이 푸른밤, 지순한 보름달에 세상이 환하다. 지나가던 차를 멈추고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푸르스름한 지폐 몇 장을 보시한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또 넘으면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마지막 사원앞에 가서야 남루한 달 하나가 뜬다.

거뭇한 이마를 밝힐 평생의 달 하나 얻는다.

 

시집 『달의 이동 경로』(지혜사랑, 2016) 중에서

 

 


 

 

이서빈 시인 / •

 

 

마침표 하나 찍어놓고 보면 가장 좁은 문 같기도 하고 감옥을 막고 있는 철문 같기도 하다. 마침표가 없는 책은 없다. 어떤 빛나는 철학이나 슬픔, 기쁨에도 마침표는 있다.

 

외눈박이 눈은 그 사람을 막고 있는 점이다. 내 어렸을 때 던졌던 조약돌 같아 읽고 있던 책에서 퐁당퐁당 소리가 물방울처럼 튀어 오른다.

 

이야기 하나에는 수많은 점이 있다. 점 하나 잘못 찍어 님이, 남이 되기도 하고 궁이 공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마침표가 미침표가 되기도 한다.

 

작은 점 하나에서 아주 큰 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하고 글자가 걸어 나오고 초록 선율과 붉은 신비가 콩나물 자라듯 자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점 하나, 절 안 모셔놓은 부처도 점안을 해야 비로소 눈 뜬 부처가 된다. 부처의 눈알은 지구공 같기도 하다. 바둑을 두면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고 마지막 돌 하나로 길을 막을 수도 있다.

 

말이나 문장 뒤에 찍지 않고 슬쩍 넘어가기도 하는 점. 긴장감에 꿀꺽 삼킨 침 한 방울 같은 것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한 뒤 살짝 열어놓기도 하지만 며칠 뒤엔 사라지는 점. 한적하게 비어있는 곳엔 작은 점 하나 찍혀 있다.

 

실수, 노여움, 슬픔은 모두 마침표를 안 찍은 것들. 우주를 반복하는 저 꽃잎도 한 번은 찬란한 마침표를 꾹 찍을 것이다.

 

시집 『달의 이동 경로』(지혜사랑, 2016) 중에서

 

 


 

李書彬 (이서빈) 시인

경북 영주에서 출생. 한국 방송통신 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이동 경로』(지혜사랑, 2016)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