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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상훈 시인 / 미인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3.

이상훈 시인 / 미인도

 

 

벽에 걸린 미인도 속에서 여인이 걸어 나온다

 

능수버들가지 입에 물고서 사뿐사뿐 걸어 나온다

 

반닫이궤 앉은뱅이경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한다 뺨에 분칠을 하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그린다 빠끔히 열린 주막 문틈으로 서걱서걱 들리는 대슘치마 벗는 소리에 오금저린 사내들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혜원이 사랑했던 여인이 술주전자를 들고 걸어 나온다 홑적삼에 속속곳만 입은 여인이 벽 속에서 걸어 나온다 딱히 저 보기가 민망한 술꾼들은 대포잔에 코를 박고 어서 미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두루 술잔을 한 잔씩 돌리면서 혜원을 말한다 내게 이보다 더없는 사랑을 주고 간 남자가 이 세상에 또 누가 있느냐고 묻는다 세기의 공간을 뛰어넘어 이만큼 오래 사랑을 받는 여인을 보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치마폭을 허리에 휙 감고 호호호 웃으면서 벽 속으로 걸어간다

 

사내들이 단숨에 술잔을 입안에 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벽으로 걸어간다

나도 미인을 따라서 벽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혜원- 신윤복. 호는 혜원蕙園. 미인도美人圖를 그린 조선시대 화가.

 

웹진 『시인광장』 2015년 3월호 발표

 

 


 

 

이상훈 시인 / 무용총

 

 

  북두의 일곱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긴 꼬리 혜성이 떨어지는 고분군(古墳群)을 지나가고 있었다

  묘실 문지기를 하는 검은 들개가

  저녁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목 놓아 컹컹 우짖었다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석실 괴석에 앉아서

  흰 달무리 이는 황혼녘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화구(畵具)를 들고 구릉언덕을 넘어오는데 숨이 턱에 찼다

  멀리서 수레를 끌고 나온 시종이 공손히 절을 하였다

  촛농이 흐르는 널길을 지나서 측실이 딸린 널방으로 따라갔다

  점박이무늬 주름치마를 입은 무용수들이 긴 소매를

  어깨 뒤로 늘어뜨리면서 비천군무를 춤추고 있었다.

  악사의 뿔 나팔이 울리면서 새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쓴

  남녀혼성합창단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불렀다

 

  귀족풍을 한 석실의 주인공이 휘장을 열고 나와 배례하였다

  왕족의 한 갈래인 대대로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은 사후에 그가 묻힐 묘실 도면을 내게 보여주면서

  백회 칠을 한 서쪽벽면에 수렵도를 그려달라고 하였다

 

  붉은 말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는 말 위에서

  젊은 기마무사가 호랑이를 사냥하는 밑그림을 그렸다

  말이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로 몸을 돌려 맥궁을 당기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묘사하여 웅혼한 남아의 기상을 살렸다

  해의 맞은편에 달을 그리고 주름진 산맥과 구름도 그려 넣어야

  생생한 현실을 더욱 사실감 있게 표현할 수 있을 같아

  중앙에 오방색으로 채색한 산수화를 그리고

  천정고임 밑면은 붉은 밤색으로 인동넝쿨무늬를 그려 벽화를 마감하였다

 

  묘주(墓主)는 주검 칸에 반듯이 누워 거문고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의 처와 처첩은 묘대 곁에 시립하여 순장을 마칠 준비를 하였다

  악공은 비장하게 현(玄)을 뜯고 무희들은 주인의 왕생을 축원하면서 춤을 추었다

  나는 고개 숙여 합장을 하면서 저 하늘에 가서도

  내세에서와 똑같은 현실세계가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봉분입구를 두껍게 회반죽을 하여 돌문을 닫았다

  혼자 쓸쓸히 고분을 빠져 나오는데

  밤하늘의 높쌘구름을 비껴서 가로질러 가던

  떠돌이 소행성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7월호 발표

 

 


 

이상훈 시인

1960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도 혼자 가는 길이다』(1990),  『나비야 나비야』(2013),  『미인도』(2016)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