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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지 시인 / 은빛 눈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3.

김현지 시인 / 은빛 눈새

 

 

  꽁꽁 언 천지(天池)의 빙원을 밟고

  사월의 신부처럼 내가 걸어 들어 갔을 때

  아득한 봉우리 너머로 하얀 날개를 펴 드는 은빛 눈새

  그대였던가

  어느 날 말없이 내 곁을 떠난 그대였던가

  저물녘의 자작나무 눈밭에 긴 허리를 누이듯

  기억 속의 아픈 빗금들 총총히 새벽 별빛처럼 스러져 가기를

  스러져 잊혀지기를...

  끝날 줄 모르는 유랑의 길목마다

  언뜻언뜻 다가서는 내 안의 그대

  오늘 이 저무는 백두의 하늘 끝에

  소지 올리듯, 소지 올리듯 날려 보낸다

  젖은 날개 퍼덕이며 울던

  젊은 날의 시퍼런 공명(共鳴) 둥둥 북소리로 울려 놓고

  다시는 떠돌 일 없고

  더 날아 오를 높이도 없는 천상에 고향을 두고

  우리 너무 오래 멀리 떠돌았구나

  떠돌고 있었구나

 

 시집 『은빛 눈새』(문학아카데미, 2006) 중에서

 

 


 

 

김현지 시인 / 고삐 2

 

 

  봄꽃들 지고

  감꽃 흐드러지게 피어 뒤란 가득 환한 꽃등을 드리울 때쯤

  몇 달 동안 어미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암송아지 가끔씩

  보리밭 이랑 잽싸게 내닫거나

  못자리판 첨벙 뛰어들어 휘젓곤 하여

  어미소의 근심 선한 눈가에 넘쳐나곤 할 때

  아버지는 장정 두엇을 불러 송아지에게 코뚜레를 끼우셨다.

  노송나무 잘 다듬은 가지

  물에 불리고 불에 굽기도 하며

  몇 날을 공들여 만드신 하이얀 코뚜레

  코뚜레의 뾰족한 끝날에 꿰어 걸린

  울음 한 번 못 울고 삽시에 꿰어 걸린

  송아지의 코에서 흘러내린 피, 검붉은 피와

  송아지의 슬픈 눈을 바라보던 내가

  두 눈 가리고 돌아서 울고 있을 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셈이 밝아지고 사유(思惟)가 생기면

  제 고삐에 제가 묶이고 마는 기라“

 

  아! 그때 보고 말았다 나는 송아지의......

  고삐에 묶여 뒷발 바둥이는 송아지의 빼앗긴 사유가

  내 사유를 쉴새 없이 자라나게 하여

  질긴 고삐 한 가닥으로 칭칭 내 목에 감겨오는 것을

  감겨와......

  도무지 풀어낼 수 없는 매듭 하나씩

  내 눈가에 드리우는 것을.

 

 시집 『포아풀을 위하여』(문학아카데미, 1996) 중에서

 

 


 

김현지 시인

경남 창원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연어일기』,  『포아풀을 위하여』,  『풀섶에 서면 내가 더 잘 보인다』, 『은빛 눈새』, 『그늘 한 평』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