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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시인 / 은빛 눈새
꽁꽁 언 천지(天池)의 빙원을 밟고 사월의 신부처럼 내가 걸어 들어 갔을 때 아득한 봉우리 너머로 하얀 날개를 펴 드는 은빛 눈새 그대였던가 어느 날 말없이 내 곁을 떠난 그대였던가 저물녘의 자작나무 눈밭에 긴 허리를 누이듯 기억 속의 아픈 빗금들 총총히 새벽 별빛처럼 스러져 가기를 스러져 잊혀지기를... 끝날 줄 모르는 유랑의 길목마다 언뜻언뜻 다가서는 내 안의 그대 오늘 이 저무는 백두의 하늘 끝에 소지 올리듯, 소지 올리듯 날려 보낸다 젖은 날개 퍼덕이며 울던 젊은 날의 시퍼런 공명(共鳴) 둥둥 북소리로 울려 놓고 다시는 떠돌 일 없고 더 날아 오를 높이도 없는 천상에 고향을 두고 우리 너무 오래 멀리 떠돌았구나 떠돌고 있었구나
시집 『은빛 눈새』(문학아카데미, 2006) 중에서
김현지 시인 / 고삐 2
봄꽃들 지고 감꽃 흐드러지게 피어 뒤란 가득 환한 꽃등을 드리울 때쯤 몇 달 동안 어미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암송아지 가끔씩 보리밭 이랑 잽싸게 내닫거나 못자리판 첨벙 뛰어들어 휘젓곤 하여 어미소의 근심 선한 눈가에 넘쳐나곤 할 때 아버지는 장정 두엇을 불러 송아지에게 코뚜레를 끼우셨다. 노송나무 잘 다듬은 가지 물에 불리고 불에 굽기도 하며 몇 날을 공들여 만드신 하이얀 코뚜레 코뚜레의 뾰족한 끝날에 꿰어 걸린 울음 한 번 못 울고 삽시에 꿰어 걸린 송아지의 코에서 흘러내린 피, 검붉은 피와 송아지의 슬픈 눈을 바라보던 내가 두 눈 가리고 돌아서 울고 있을 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셈이 밝아지고 사유(思惟)가 생기면 제 고삐에 제가 묶이고 마는 기라“
아! 그때 보고 말았다 나는 송아지의...... 고삐에 묶여 뒷발 바둥이는 송아지의 빼앗긴 사유가 내 사유를 쉴새 없이 자라나게 하여 질긴 고삐 한 가닥으로 칭칭 내 목에 감겨오는 것을 감겨와...... 도무지 풀어낼 수 없는 매듭 하나씩 내 눈가에 드리우는 것을.
시집 『포아풀을 위하여』(문학아카데미, 199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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