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아 시인 / 꽃피는 칼
칼자루도 없이 칼은 새파랗다
봉안(鳳眼)이 조각되어 있는 칼날, 칼이 하는 일은 바람을 베는 일이지만 자투리 필요한 한 뭉치 바람이 스스로 와서 베일 때가 많다.
이 칼은 광석이 아니다. 양쪽 날을 가지고 있는 검(劍)의 끝은 여전히 벼려지는 중이어서 휘어져 있다. 누가 산속에 칼을 꽃아 두고 갔나. 새파랗게 녹슬면서 가끔 꽃도 피우는 그 칼을 누군들 쉽게 뽑겠는가.
칼 한 자루를 오래 감상 했다 향기가 일획으로 지나간다.
정점으로 향한 떨림의 순간, 바람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 칼은 별자리 방향을 따라 빛이 바뀐다.
칼은 스스로 시들어 칼집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간다.
칼 가는 사람도 없이 파랗게 날을 세우고 휘두르는 힘이 다 빠지면 절옆으로 휘어진다. 한데 엉키는 칼끝을 조심해야하며 봄이면 멀리 동쪽에서 찾아오는 꽃이 있어 서리와 동풍을 빼내야 한다.
일합一合의 불꽃도 없이 꽃피운 칼 갈라지는 칼끝에서 꽃잎 떨어진다.
시집 『혼잣말씨』(문학의전당, 2015) 중에서
최정아 시인 / 일몰의 건초더미
일몰이 건초더미위에 얹혀있다
소잔등은 일몰과 닮아있다. 배고픈 겨울밤외양간에는 밤새 노릇노릇한 들판을 씹는 소리가 들렸다
일몰이 건초더미에 얹힐 때마다 소잔등이 생각난다. 이끄는 데로 끌려가던 목덜미로 한 계절을 되새김질한 흔적이 반질반질하게 털이 벗겨져 있었다.
지난 계절을 저장해 두고 먹는 건 사람하고 똑같았다 건기와 우기가 빠져 나간 건초더미는 여전히 벌판의 바람 창고다.
입맛이 없던 소에게 입을 벌리고 막걸리 잔을 들이 붓던 아버지, 남루한 들판의 여러 채 잘 마른 집을 걷어서 먹이고 이랴, 빈 들녁을 집으로 끌고 오던 그러다가 소잔등에 내려앉은 일몰을 툭 툭 털어내던 손,
이제 밤새 일몰을 되새김질하는 소의 섭생을 알겠다. 끝이 뾰족한 삼각지붕의 건초더미를 건성건성 삼키면 몸 안에서 구별 되지 않은 계절이 입구를 찾고 곱씹은 일몰이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고기 한 점 오래 씹으면 일몰의 맛, 잘 마른 지붕의 맛 쩔렁거리는 워낭의 맛이 난다
시집 『혼잣말씨』(문학의전당, 2015)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설희 시인 / 벽이 온다 (0) | 2019.06.15 |
|---|---|
| 전다형 시인 / 중환자실은 울울창창 슐만의 숲* (0) | 2019.06.15 |
| 박천순 시인 / 오래 달인 어둠 외 1편 (0) | 2019.06.14 |
| 송미선 시인 / 프린세스 모텔 외 1편 (0) | 2019.06.14 |
| 박성현 시인 / 빛의 모서리 외 4편 (0) | 2019.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