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양수덕 시인 / 투명인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1.

양수덕 시인 / 투명인간

 

 

  너는 오늘도 나를 보지 못하고

  손을 잡았으나 장갑만 남았다 한다

  말을 받았으나 구겨진 포장지만 잡힌다 한다

  눈을 보았으나 검은 창이 다가선다고 한다

 

  히히 나도 너를 보지 못한다는 것

 

  유령의 집으로 들어간 우리

  공기는 더없이 포근하고 이마가 시리게 차갑다

  화분들은 생기가 넘치고 눈치 없이 시들어간다

  냉장고는 조용히 굴러가고 악다구니 지른다

 

  나의 신전에는 너의 의자가 없고‘

  네 거울 속에는 나의 저녁이 없다

 

  이상한 뒤죽박죽,

  근시안이 자라는 안개숲

 

  그 틈을 비집고

 

  광택을 낸 입술로

  다 보여줄게요 보여줄게요

  한 생이 식기 전에

  다 보여줄게요 보여줄게요

 

  나는 너의, 너는 나의

  그릴 수 없는 문장 부호

  물오른 달변의 뒷면

 

  투명한 그늘을 뒤집어쓰고 재주를 한껏 피워보는 우리는

 

시집 『너무 많은 입』(문학세계사, 2015) 중에서

 

 


 

 

양수덕 시인 / 근처에

 

 

  개미들이 방을 빠져나가고

  개운하지 못한 잠이 폭설처럼 내리고

 

  눈 부릅뜬 검은 문

 

  할머니, 천장 주위에서 떨면서 내려다본다

  모로 누운 채 굳어버린 자신의 사지와 풀린 눈

  밥공기에 말라붙은 밥알

  꿈과 생시를 덮고 있는 때 절은 꽃무늬 이불을

 

  소리는 바깥세상에서 끓어오르고

  말문 닫힌 방의 높다란 방음벽 안쪽에서

  하얗게 엎질러진 묵음들

  낮인지 밤인지 몇 달이 지난건지

 

  약통 곁 한 벌의 수저 곁 하얀 머리카락 곁

  서서히

  가까이

  파고들어 수의를 짰던 얼음뼈

 

  검은 문 밀며 터진 맨발로 서성거리는 할머니,

  불려진 어둠 자락을 움켜쥔다

  어디로 갈거나

 

시집 『너무 많은 입』(문학세계사, 2015) 중에서

 

 


 

양수덕 시인

성신여자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너무 많은 입』(문학세계사, 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