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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은 시인 / 하우스 푸어
바지가 헐렁해지고 당신과 나는 전력 질주하고 있다
지도의 한 모서리에 미세한 바람이 일자 나뭇잎들이 무작위로 떨어졌다
멀리서 달려오는 호수는 사실은 어제의 호수이어서 깜깜해졌다가 밝아지는 유리창이 아니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주었지
한 잎이 또 한 잎에 등 떠밀려 조용히 엎드려 있어도 아이들은 한 땀 씩 길게 웃자라 처음 보는 손바닥 위로 싸돌아다니는 걸까
털옷을 뒤집어쓰고 당신과 나는 얼음집 속에 엎드려 있네
앞선 발자국들이 얼음장 같다가 뜨거워지는 음악을 듣는지 머리를 흔들며 저 집 모퉁이를 돌고 있어
벼랑에서 떨어진 바람 한 줌이 당신과 나의 옆구리를 정조준하고 사라지는데
오후는 오전을 이유 없이 밀어내고 가지는 또 한 가지를 소리 없이 휘감아 오르는 그때
바지가 헐렁해지고 당신과 나의 오후는 자꾸 깜깜해지는 걸까.
시집 『안녕, 피타고라스』(작가세계, 2015) 중에서
김서은 시인 / 낳고는 낳고를 낳고
그러므로 나를 낳고 그러므로 드디어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를 낳고 말았다 그러므로 새벽마다 죄 사함 받는 아버지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자유롭게 살다가 독거노인으로 죽고 싶은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깃털 한 장 풍경 한 장으로 흘러가자고 날마다 꼬드꼈다 시시콜콜한 문제를 넘어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도 있는 두려움들이 시시콜콜 내 속에서 스멀거리고 있는 걸까 그러므로 나는, 그러므로 아버지는, 드디어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오 분 후면 사라지는 것 들을 일평생 증오하고 다크쵸코렛같이 혀끝에 녹아버릴 것 들을 양 손으로 품었다 어느 날 몸 안에 고여 있는 것들이 쏟아져 한 컵 물속을 부옇게 떠다니고 당신의 의자 뒤쪽으로 콜타르같이 태양이 흘러내릴 때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시간의 먼지들 어디선가 비는 내리고 후루룩 국수가락을 누군가 넘기는 이 저녁 너는 잘못 박힌 못같이 내 안에 깊숙이 박히고 내 뒤통수를 다시 한 번 후려치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나는 나를 통과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를 통과하고 어떤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를 통과하지 못했다
저 속을 흐르는 강물 뒤척이는 소리 슬픔의 속껍데기들이 떠다니는 나는 이들의 첫 페이지를 삭제하는 중이다
시집 『안녕, 피타고라스』(작가세계,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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