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서은 시인 / 하우스 푸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

김서은 시인 / 하우스 푸어

 

 

  바지가 헐렁해지고

  당신과 나는 전력 질주하고 있다

 

  지도의 한 모서리에 미세한 바람이 일자

  나뭇잎들이 무작위로 떨어졌다

 

  멀리서 달려오는 호수는 사실은 어제의 호수이어서 깜깜해졌다가 밝아지는

  유리창이 아니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주었지

 

  한 잎이 또 한 잎에 등 떠밀려

  조용히 엎드려 있어도 아이들은 한 땀 씩 길게 웃자라

  처음 보는 손바닥 위로 싸돌아다니는 걸까

 

  털옷을 뒤집어쓰고

  당신과 나는 얼음집 속에 엎드려 있네

 

  앞선 발자국들이 얼음장 같다가 뜨거워지는 음악을 듣는지

  머리를 흔들며 저 집 모퉁이를 돌고 있어

 

  벼랑에서 떨어진 바람 한 줌이 당신과 나의 옆구리를 정조준하고 사라지는데

 

  오후는 오전을 이유 없이 밀어내고

  가지는 또 한 가지를 소리 없이 휘감아 오르는 그때

 

  바지가 헐렁해지고

  당신과 나의 오후는 자꾸 깜깜해지는 걸까.

 

시집 『안녕, 피타고라스』(작가세계, 2015) 중에서

 

 


 

 

김서은 시인 / 낳고는 낳고를 낳고

 

 

그러므로 나를 낳고 그러므로 드디어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를 낳고 말았다 그러므로 새벽마다 죄 사함 받는 아버지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자유롭게 살다가 독거노인으로 죽고 싶은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깃털 한 장 풍경 한 장으로 흘러가자고 날마다 꼬드꼈다 시시콜콜한 문제를 넘어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도 있는 두려움들이 시시콜콜 내 속에서 스멀거리고 있는 걸까 그러므로 나는, 그러므로 아버지는, 드디어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오 분 후면 사라지는 것 들을 일평생 증오하고 다크쵸코렛같이 혀끝에 녹아버릴 것 들을 양 손으로 품었다 어느 날 몸 안에 고여 있는 것들이 쏟아져 한 컵 물속을 부옇게 떠다니고 당신의 의자 뒤쪽으로 콜타르같이 태양이 흘러내릴 때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시간의 먼지들 어디선가 비는 내리고 후루룩 국수가락을 누군가 넘기는 이 저녁 너는 잘못 박힌 못같이 내 안에 깊숙이 박히고 내 뒤통수를 다시 한 번 후려치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나는 나를 통과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를 통과하고 어떤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를 통과하지 못했다

 

저 속을 흐르는

강물 뒤척이는 소리

슬픔의 속껍데기들이 떠다니는 나는

이들의 첫 페이지를 삭제하는 중이다

 

시집 『안녕, 피타고라스』(작가세계, 2015) 중에서

 

 


 

김서은 시인

2006년 《시와 세계》 여름호로 등단. 시집으로 『안녕, 피타고라스』(작가세계,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