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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춘희 시인 / 바벨의 시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

최춘희 시인 / 바벨의 시간

 

 

  먼지처럼 왔다가

  그는 갔다

 

  불면과 두통이

  오래도록 빈소에 남아

  그의 마지막을 조문했다

 

  잠들지 못한 밤마다

  어둠 속에서 야옹거리던

  줄무늬고양이

  창가에 앉아

  무덤의 노래를 불렀다

 

  유령같이 떠돌던 정처 없는

  영혼은 죽어서야 둥근 물방울의

  집을 가졌다

 

  햇빛 좋은 날 강가에 나가보라

  살랑거리는 봄바람 실려

  반짝이는 물결 위로

  어둠을 털고 막, 솟구치는

  흰 새의 깃털 볼 수 있으니

 

  헛되고 헛된 세간의 일

  깊은 잠속에 내려놓고 먼지처럼

  왔다가 새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계간 『열린시학』 2012년 봄호 발표

 

 


 

 

최춘희 시인 / 입양

 

 

  태어나기도 전에 너는 버려졌지

  공중화장실 변기 속이 너의 고향이지

  눈도 코도 입도 지워진 채 오직 배설의 형태로

  오물덩어리로 무뇌아로 존재하는

  도시의 치부

 

  세상의 호적에 너는 없다

  태어나기도 전에 깜깜한 밤하늘에게

  입도선매되었으므로

 

  사산된 배를 끌어안고 어미는 오늘도

  어둠의 시궁창 헤매 다니지

  티끌만큼도 죄책감이나 후회는 없지

 

  지하철 역 사물함에서 여행 가방에

  쑤셔 박힌 채 담겨진 너를 발견한대도

  결코 놀라지 않지

  티브이에서 요란을 떨며 카메라를 비춰도

  그건 일회성 쇼! 쇼! 쇼!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너는 버려졌지 아무도 네게 관심 따위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

 

  세상의 호적에 이름 올리지 못한 대신

  저 흰 구름에게, 자유로운 바람에게, 여름비에게

  이제 막 꽃잎을 여는 나팔꽃에게

  나를 데려가 줘

 

반년간 『시에티카』 2011년 하반기호 발표

 

 


 

최춘희 시인

1956년 마산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졸업. 1990년 《현대시》신인상에 고등어 외 5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세상 어디선가 다이얼은 돌아가고』, 『종이꽃』, 『소리 깊은 집』, 『늑대의 발톱』, 『시간 여행자』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