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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박은경 시인 / 도착(倒錯)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

김박은경 시인 / 도착(倒錯)

 

 

  종로 2가 심야극장쯤에서 함께 영화를 봤다고 해두지

  이미 없는 그를 위해 내가 대신 해주었다고도

  이미 서지 않으니 더는 서지 않는 것, 하고 말했다고

  이미 젖지 않으니 더는 젖지 않는 것, 하고 답했다고

  그의 속삭임이 먼지처럼 떠다녔다고 해두지,

  잠들어 있으면 더는 잠들 수 없어

 

  꿈꾸려는데 뤼미에르씨가 무대 인사를 했다고 해두지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허공을 향해 입 벌린

  두루마리 휴지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영화 속 열차가 벽에서 튀어나와 검은 산통은 박살났다고

  뽑을 수 있는 괘는 정해져 있으니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고

  뤼미에르씨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고 해두지,

  우린 이미 없으니 끝까지 없을 텐데요

 

  우리들의 중심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다고 해두지,

  언제나 중심은 서지 않는다고 젖지도 않는다고

  휴지의 중심처럼 텅 빈 거라고

  텅 빈 채 온통을 감싸는 거라고

 

  스크린을 등지고 선 얼굴이

  손잡이 달린 둥근 흑점처럼 보였다고 해두지

  태양과 한 방향으로 돌며 前方이라 믿는 걸 보니

  그와 나와 뤼미에르 씨 모두 恰似일 거라고

 

  기괴한 事情의 빛 속에서 필름은 밤 내내 돌아갔다고

  빛을 얻은 어둠이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열차는 자꾸 도착만 했다고 출발 같은 건 없었다고

  그때 그 자가 한 번 더 해줄 수 없는지 물었다고 해두지

  그 말을 하는 입이 녹기 시작했다고

 

  그러려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하는데

  내일과 다음 생 중 어느 것이 먼저 올지 나 역시 모르는데

  둘러선 악령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으니

  그건 좀 어렵겠다고 말할 때 텅 빈 눈동자가

  글썽 거리기까지 했다고 해두지,

  만나기를 고대하는 한 우린 절대 만날 수 없을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서 끝나는 거냐고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거냐고

  결론은 항상 똑같다고 중얼거린 걸로 해두지

 

  텅 빈 중심에 전언들이 가 닿으며 만드는 동그라미

  동그라미들이 퍼져가며 만드는 동그라미

  한 먼지가 다른 존재에 닿을 때마다

  점점 더 크게 비는 중심의 동그라미

 

  먼지들은 흑점으로 뭉치지만

  그 내부는 어둡지 않을 거라고

  火印 같은 기억 탓에 선연할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들은 제때에 영원히 오는 거라고

  풀린 휴지 끝을 감을 때

  아침이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고

 

* 열차의 도착 - 뤼미에르가 만든 영화이자 최초의 영화 제목

 

월간 『우리시』 20010년 4월호 발표

 

 


 

 

김박은경 시인 / 중독

 

 

처음이라는

진짜라는 영원이라는

거짓이라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9회 말이라는 마지막이라는

역전이라는 희망이라는

중독, 이건 스도쿠 게임

한 칸에 하나씩의 수(數)만 쓸 수 있으니

물구나무 자세로 차가운 고요를 내쉬었다면

끓어오르는 치욕을 들이마실 순서

천국과 지옥을 함께 준대도 좋아,

좋아서 8자 춤을 춘 거라면

준비된 파국을 짓씹는 순서

하루 같은 일생을 살아왔다면

일생 같은 하루를 견딜 순서

 

이 완벽한 결함은 사랑할 수밖에 없어 이토록 기이하게 허튼 짐승,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귀 기울여 들을수록 퇴화해가니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 울고 조금 웃는다.

 

계간 『예술가』 2011 봄호 발표

 

 


 

김박은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대, 홍익대 산미대학원 졸업. 2002년《시와 반시》에〈감전〉외 4편을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시집으로『온통 빨강이라니』(문학의전당, 200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