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민하 시인 / 검은고양이소셜클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0.

이민하 시인 / 검은고양이소셜클럽

 

 

지붕 위에 무릎을 깔고 우리는 마주 봅니다. 두 손을 몸에 넣고 쏟아질 듯 인사합시다. 모호하게 웃으세요. 백내장 낀 거울처럼 통성명을 하세요.

 

눈부신 낮의 계획들이 거리의 낯을 바꾸지만 우리는 감각의 고수들. 비행접시처럼 출몰하는 우리의 기원은 기원전부터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파양된 아버지. 집으로 다시 초대된다면

 

선물처럼 방울을 딸랑거려 줍니다. 기꺼이 목덜미를 핥아 줄 준비가 돼 있습니다. 우리들의 식탐과 단잠을 위해 기억을 빌릴 줄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믿음이 아니라 예의입니다. 다가갈 땐 뒤꿈치를 들어야 하듯이.

 

우리는 모두 서로의 베이비

 

쿠킹 포일이 왁자지껄 지붕을 덮어도 우리의 관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피를 섞고 나누는 동안 우리는 틈새를 개발합니다. 바람을 뺀 풍선처럼 근육을 줄입시다.

 

모퉁이를 돌면 실험실이 있고 그가 우리를 부릅니다. 베이비. 우리의 이름입니다. 꿈의 발작을 잠재우는 약물이 그의 주머니에 있지만

 

우리의 기면증은 간질 약으론 어림없습니다. 기껏해야 눈을 잃거나 육신을 벗어던지는 게 고작입니다. 어제는 친구 녀석이 마네킹 대신 자동차 충돌 실험에 나섰더랬죠. 사체 수거반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녀석은 이미 내장을 빼돌렸습니다. 녀석이 바나나 껍질처럼 누운 길 위에서

 

당신은 이론을 펴고 우리는 이불을 폅니다. 입가의 수염을 손질하는 당신과 온몸의 털을 혀로 핥는 우리는 거울을 함께 쓰는 그루밍 패밀리. 마당의 정원수들도 털갈이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베이비

 

우리는 햇빛보다 먼저 발생합니다. 어둠의 봉지를 물어뜯어 색채들을 쏟는 최초의 마술사로서

 

첨탑 위에 매복 중인 아이들은 구름을 수제비처럼 떼어 새들을 띄웁니다. 당신을 깨우는 달콤한 모닝콜은, 그러니까 새가 아니라 우리의 허기가 지저귀는 소리. 꼬르륵 배를 움켜쥐고 구석으로 찾아들지만 표정을 숨기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란 말입니다. 이를테면 거리의 패턴으로부터 스스로의 감성을 지킨다는 것. 애인은 연못에서 헤엄치는 걸 즐깁니다. 그녀의 비키니는 한겨울에도 롱부츠보다 감동적입니다. 모피상들이 혀를 끌끌 찼지만

 

누드 고양이 스핑크스나 짧은 꼬리 밥테일은 또 어떤가요.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므로 난해한 취향이라는 견해는 곤란합니다. 찢어발긴 쥐 선물은 함께 나누고 싶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베이비

 

사방이 막힌 당신 안에서 구멍을 내고 숨을 돌리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멸종되지 않는 천재지변. 먼 옛날 벽화와 미라를 뚫고 화형장의 잿더미에서도 탈출했습니다. 화상 자국을 들추지 마세요. 당신이 붕대를 찾을 때 우린 이미 공을 굴리며, 안녕. 숨이 끊기는 순간에도 죽음의 신을 따돌리며, 안녕.

 

해가 뜨면 우리는 흩어집니다. 동공의 변화에 집중하세요. 부러진 연필심처럼 인사합시다. 눈물이 새는 두개골을 목발로 걷어차며 귀가하세요. 당신은 자식들에게 입양된 아버지. 목격되는 순간 달아나고 발설되는 순간 사라지지만 우리는 소통의 고수들.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꼬리를 날리며

 

음표처럼 방울을 달아 줍니다. 기꺼이 노예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라 음악입니다. 사라질 땐 접시처럼 귀를 비워야 하듯이.

 

시집 『모조 숲』(민음사, 2012) 중에서

 

 


 

 

이민하 시인 / 거식증

 

 

골격만으로 표정을 짓는 사람을 만나면 연애를 할 테야. 아이스크림처럼 살 살 녹는 너의 살. 살을 모두 발라내고 연애를 할 테야. 날마다의 저녁은 성찬. 은촛대와 접시를 나르는 하얀 머릿수건과 에이프런을 두른 여자들. 그녀들은 달빛 엉덩이를 흔드네. 나풀거리며 우리는 끝도 없이 긴 사각 식탁에 모여 핏물이 덜 빠진 양고기를 씹네. 허기와 요리의 접경인 허리에서 살과 살은 섞이네. 불어나는 허리 아래 뒤축 닳은 구름. 당신의 부피가 죽이는 것들. 당신은 너무 별처럼 헤퍼. 당신이 모은 눈물은 밤마다 화려해서 식도를 토해내는 소화불량. 부드러운 뼈대를 혁대처럼 날려봐. 섬세한 그림자의 각도. 관절마다 따뜻한 어둠의 유배. 골격만으로 울음을 우는 사람을 만나면 연애를 할 테야. 뼈 끝에서 비눗방울처럼 톡 톡 부서지는 눈물. 뼈와 뼈가 다리를 포개고 뼈와 뼈가 잔을 들고 창을 바라보네. 온몸의 창살은 육질의 우리를 안으로 밀어 넣고 내장 같은 아침을 게우네.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문학과지성사, 2008) 중에서

 

 


 

이민하 시인

1967년 전주에서 출생. 2000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환상수족』(열림원, 2005), 『음악처럼 스캔들처럼』(문학과지성사, 2008),『모조 숲』(민음사, 2012)이 있음. 제1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