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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종권 시인 / 아산호는 흙처럼 돌처럼 누워 있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0.

장종권 시인 / 아산호는 흙처럼 돌처럼 누워 있다

-아산호 가는 길 21

 

 

  죽은 것은 산 것보다 강하다.

  죽은 것은 죽지 않고 살아서 산 것들의 가슴에

  산 것들보다 오래까지 살아남는다.

 

  흙을 보라, 돌을 보라, 물을 보라.

  바람을 보라, 구름을 보라, 하늘을 보라.

 

  죽어있는 저 위대한 주검 앞에

  살아있는 누가 가슴을 열어도,

  그 가슴은 가슴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는

  죽은 것에 대한 살아있음의 공포만 남는다.

 

  아산호 가는 길에 살아있는 나는

  죽어서 더 위대한 그대를 만난다.

  그대는 바람처럼 꿈틀거리면서도

  그대는 흙처럼 돌처럼 누워 있구나.

  그대는 물처럼 구름처럼 흐르면서도

  그대는 하늘처럼 박혀 있구나.

 

시집  『아산호 가는 길』(리토피아, 2002) 중에서

 

 


 

 

장종권 시인 /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아산호 가는 길 92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운 껍질을 벗고

  산 것들은 생명의 소중한 속살을 파내어

  우주의 먼지 속으로 모조리 던져버려라

  보이는 것으로 보았다 말할 수 없고

  들은 것으로 들었다 말할 수도 없는  

  미래의 꿈들이 절망적으로 춤추는 곳에서  

  꽃은 꽃으로 서있어도 더 이상 꽃이 아니다  

  아름답게 피어도 더 이상 피었다 말할 수 없다  

  미치도록 좋았던 그대에게 묻노니 지금도 황홀한가  

  흘러간 자리에도 꽃은 피지만 피었다 말할 수 없다  

  피어도 피었다 할 수 없으니 이제 꽃은 꽃이 아니다  

  사라진 들에 바람은 불어서 어쩌자는 것이냐  

  얼굴 없는 종족들에게 향기는 날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사라진 것들의 무덤 위로 거대한 꿈의 궁전은 무성하게 자라고

  얼굴 없는 존재들은 밤이나 낮이나 클릭, 클릭, 클릭,  

  혼자서도 섹스를 한다  

  드디어 머리 아픈 한밤 엮어내는 상상의 세계가 만병을 통치한다  

  심장을 광대한 허공 속에 띄워놓고

  맛없는 땀과 식은 피를 뿌려대는

  이 저녁 어둠은 빛처럼 황홀한 그림 그리며 다가서고 있다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

  살아야 할 이유 있어도 굳이 목을 꺾어버려라

  슬퍼하는 이 없어 죽어도 결코 죽음답지 못하리라

 

계간 『리토피아』 2003년 가을호 발표

 

 


 

장종권 시인

1985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시집으로 『아산호 가는 길』, 『꽃이 그냥 꽃인 날에』 등과 장편소설 『순애』 그리고 창작집 『자장암의 금개구리』가 있음. 인천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현재 『리토피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