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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계헌 시인 / ‘붉다’ 앞에 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0.

송계헌 시인 / ‘붉다’ 앞에 서다

 

 

  신호를 기다리며

  지금 저 붉은 신호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면

  지지 않는 동백이 되어

  이 거리에 선혈 낭자해 진다면  

  나는 여기 이대로 서서

  천년세월을 뿌리내릴 것이고

  인도 무굴왕의 옛사랑을 노래할 것이고

  온갖 추억을 흔들어 세숫대야에서 쩔렁이는

  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

  저 ‘붉다’라는 말 앞에 서서

  오지 않는 백야를 기다릴 것이고

  언젠가 산길에서 만났던

  찔레열매 그렁한 눈물을 닦아줄 것이고

  모천을 그리며 붉어진

  연어의 무늬 진 살을 만져볼 것이라

  그리고 그리고도

   ‘붉다’라는 말에 목이 메어

  이파리처럼 눈 시린

  등 푸른 생선 삼키지도 못하리니

  오십 년을 키워온 견딜 수 없는 근성이여

  내 생을 흔들던 카펫이여

  나 이십 년 전에도 여기 이렇게 서서

  푸른 신호 기다렸으니

  욱신대는 상처 하나

  발아래 내려놓지 못했으니

  내 안으로 흘러드는 시간의 낙화를 기다리며

 

시집 『붉다 앞에 서다』 (고요아침,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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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헌 시인 / 개망초

 

 

  숲에는 감탄사가 만발했지요

  아스피린처럼 하얗게 흩어지는 개망초

  바람의 안개같은 입김 사이

  햇살의 온도계 눈금이 열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한 허무가 또 다른 허무를 어루만지는

  누대의 흰 꽃잎이 개망초의 다른 이름이라고 누가 말했던가요

  저 파리한 이파리에 마음 베인적 있었다고 당신은 말했던가요

  숲에는 햇살과 바람의 경계가 큰 나무의 잎맥처럼 살아나는데

  나는 그늘 아래 개망초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내 살속을 파고드는 꽃잎의 전각

  흔들리는 꽃대가 빈 하늘에 발자국을 찍어 넣고 있었지요

  묻어 나는 그늘의 고요

  내 심장의 뒷방같은 날들이 개망초 향기로 흘러 가고

  숲에는 감탄사가 만발했지요

  바람에 흔들리는 내 빈 발자국의 뿌리는

  검은 대지가 피워낸 개망초의 깊은 마음이었지요

 

계간 『작가마당』 2009년 겨울호 발표

 

 


 

송계헌 시인

대전에서 출생. 공주 교대, 한남대 사회 문화 대학원 문학 예술학과 졸업. 1989년도 《심상》誌로 등단. 시집으로 『붉다 앞에 서다』 등이 있음. 제 9회 대전 시인 협회상 수상. 현재 대전 충남 작가회, 심상 시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