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헌 시인 / ‘붉다’ 앞에 서다
신호를 기다리며 지금 저 붉은 신호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면 지지 않는 동백이 되어 이 거리에 선혈 낭자해 진다면 나는 여기 이대로 서서 천년세월을 뿌리내릴 것이고 인도 무굴왕의 옛사랑을 노래할 것이고 온갖 추억을 흔들어 세숫대야에서 쩔렁이는 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 저 ‘붉다’라는 말 앞에 서서 오지 않는 백야를 기다릴 것이고 언젠가 산길에서 만났던 찔레열매 그렁한 눈물을 닦아줄 것이고 모천을 그리며 붉어진 연어의 무늬 진 살을 만져볼 것이라 그리고 그리고도 ‘붉다’라는 말에 목이 메어 이파리처럼 눈 시린 등 푸른 생선 삼키지도 못하리니 오십 년을 키워온 견딜 수 없는 근성이여 내 생을 흔들던 카펫이여 나 이십 년 전에도 여기 이렇게 서서 푸른 신호 기다렸으니 욱신대는 상처 하나 발아래 내려놓지 못했으니 내 안으로 흘러드는 시간의 낙화를 기다리며
시집 『붉다 앞에 서다』 (고요아침, 2006) 중에서
----------------------------------------------------------------------------------------------- 송계헌 시인 / 개망초
숲에는 감탄사가 만발했지요 아스피린처럼 하얗게 흩어지는 개망초 바람의 안개같은 입김 사이 햇살의 온도계 눈금이 열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한 허무가 또 다른 허무를 어루만지는 누대의 흰 꽃잎이 개망초의 다른 이름이라고 누가 말했던가요 저 파리한 이파리에 마음 베인적 있었다고 당신은 말했던가요 숲에는 햇살과 바람의 경계가 큰 나무의 잎맥처럼 살아나는데 나는 그늘 아래 개망초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내 살속을 파고드는 꽃잎의 전각 흔들리는 꽃대가 빈 하늘에 발자국을 찍어 넣고 있었지요 묻어 나는 그늘의 고요 내 심장의 뒷방같은 날들이 개망초 향기로 흘러 가고 숲에는 감탄사가 만발했지요 바람에 흔들리는 내 빈 발자국의 뿌리는 검은 대지가 피워낸 개망초의 깊은 마음이었지요
계간 『작가마당』 2009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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