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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옥주 시인 /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

배옥주 시인 /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카페 사바나에 앉아

가젤의 눈빛을 읽는다 수사자가 되어

툭툭 바람의 발자국을 털어낸다

바위비단뱀의 혓바닥 같은

찻잔 위로 검은 유목민들이 떠다니고

소용돌이로 끓어오르는 암갈색 눈알들

야자나무 그늘이 내려오는 창가로

말굽 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이 달려온다

 

성인식을 치른 힘바족 처녀들이

내 두 개의 덧니 사이로 걸어 나오고

유두 같은,

검은 향기를 혀끝으로 음미한다

 

폭풍우 지나간 손바닥 위에

블루마운틴 한 잔을 올려놓으면

대륙의 어디쯤에서 깃털의 영혼이 나부끼고 

아라비카 전생의 내가 보인다 하얀 손바닥과

희디흰 눈자위를 가진 처녀가

유르트 같은 찻잔 속에서 어른거린다

 

이제 막 흑해의 붉은 달이 떠올랐다

 

시집 『오후의 지퍼들』(서정시학, 2012) 중에서

 

 


 

 

배옥주 시인 / 물의 집

 

 

  언니가 죽은 지 열 달 만에

  형부는 새장가를 갔다

  일 년 만에 만난 그는

  들떠있는 물방울 넥타이를 다질링 홍차로 누르고 있다

  일곱 살 때 형부로 만난 남자가

  눈물 몇 방울로 추억을 버무리는 동안

  ‘오후의 홍차’ 창가로 오후가 흘러내린다

  개업행사 치킨집 앞 피에로는

  긴 막대기로 비눗방울을 만들어 날리고 있다

  닿기만 하면 터지는 물의 집

  저건 어쩌면 비누의 상처가 살고 있는

  투명한 집인지도 모르겠다

  잊고 싶었던 시간들이 남천 열매처럼

  창가에 매달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난 탁자 밑의 아린 발에만 신경이 쏠린다

  두해 겨울을 건너뛴 부츠가

  잊었던 기억을 물집으로 달아준 것일까

  제 안의 분노가 저를 삭힌,

  절룩이는 걸음을 숨기며 허공을 내려올 때

  기어코 물집이 터지고 말았다

  뒤축에서 며칠째 아린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시집 『오후의 지퍼들』(서정시학, 2012) 중에서

 

 


 

배옥주 시인

1962년 부산에서 출생.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2008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오후의 지퍼들』(서정시학, 2012)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