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 시인 / 과일, 병, 칼이 있는 정물*
사각 탁자에 초록색 병이 하나 놓였다 병 속에 담긴 시간은 파릇파릇한 초록색이었지만 소리는 모두 삭제 되었다 병의 왼쪽으로 붉은 사과 여섯 개와 노란 레몬이 두 개 놓였다 그들의 시작이었다고 꼭지가 떨어진 곳이 위를 향했다 병의 그림자는 구부러진 채 허공에 걸렸고 사방에서 벽지의 무늬들이 간격을 좁혔다 과도는 사과와 레몬 사이에서 빛났다 인간이 잡을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은빛 칼날은 이미 레몬의 그림자 안쪽을 찌르고 있었다 탁자는 우물처럼 고요했고 그러나 나직했다 사과와 레몬이 제 그림자를 파고들 때 하얀 접시는 공기를 터뜨리며 탁자의 오른쪽 끝에 놓였다. 공포는 흔적을 앞세우지는 않는다 뜨거운 침묵 속으로 또다시 학살의 시대가 오고 있다
*조지 시걸의 작품 제목.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중에서
이원 시인 /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 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한다 신문 지면을 인쇄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PDF 서비스를 클릭한다 코스닥 이젠 날개가 없다 단기 외채 총 500억 달러 클릭을 할 때마다 신문이 한 면씩 넘어간다 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해가 떠오른다 해에도 칩이 내장되어 있다 미세 전극이 흐르는 유리관을 팔의 신경 조직에 이식 몸에서 나오는 무선 신호를 컴퓨터가 받는다는 12면 기사를 들여다보다 인류 최초의 로봇 인간을 꿈꾼다는 케빈 워윅의 웹 사이트를 클릭한다 나는 28412번째 방문객이다 나도 삽입하고 싶은 유전자가 있다 마우스를 둥글게 감싼 오른손의 검지로 메일을 클릭한다 지난밤에도 메일은 도착해 있다 캐나다 토론토의 k가 보낸 첨부 파일을 클릭한다 붉은 장미들이 이슬을 꽃잎에 대롱대롱 매달고 흰 울타리 안에서 피어난다 k가 보낸 꽃은 시들지 않았다 곧바로 나는 인터넷 무료 전화 dialpad를 클릭한다 k의 전화번호를 클릭한다 나는 6589 마일리지 너머로 연결되고 있다 나도 누가 세팅해놓은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오른손으로 미끄러운 마우스를 감싸쥐고 나는 문학을 클릭한다 잡지를 클릭한다 문학 웹진 노블 4월호를 클릭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표지의 어린 왕자는 자꾸자꾸 풍경을 바꾼다 창을 조금 더 열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클릭한다 신간 목록을 들여다보다 가격이 20% 할인된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과 15% 할인된 가격에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주문 클릭한다 창밖 야채 트럭에서 쿵쿵거리는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쿵착 쿵착 쿵차자 쿵착 나는 뽕작 네 박자를 껴입고 트럭이 가는 길을 무심코 보다가 지도를 클릭한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길 하나를 따라가니 화엄사에 도착한다 대웅전 앞에 늘어선 동백 안에서 목탁 소리가 퍼져 나온다 합장을 하며 지리산 콘도의 60% 할인 쿠폰을 한 매 클릭한다 프린터 아래의 내 무릎 위로 쿠폰이 동백 꽃잎처럼 뚝 떨어진다 나는 동백 꽃잎을 단 나를 클릭한다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나누고 ……나오는…나홀로 소송……또나(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지구와 나………… 따닥 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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