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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미영 시인 / 비열한 거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

박미영 시인 / 비열한 거리

 

 

낡은 배낭 같은 말이 지나간다. 늙었다. 그 말의 눈매가 스치자 진실은 흰 천을 걷어낸 미이라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끔찍해서 모두 고개를 돌리고 말, 대화가 더러워졌다. 우리는 그 날 진실했을까. 사실만 말했던 걸까. 오래된 말가죽 냄새가 난다. 그들은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 거리조차 탈출할 수 없겠지만 결코 항복하지 않을 절망에 빠진 군대로 말입니다. 늙은 말이 거리의 단단한 바닥을 후벼팔 듯 턱을 부빈다. 김 오르는 여물처럼 피어오르는 먼지, 말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온 거리의 개가 다 짖는다. 채찍이 허공에서 멈춘다. 어둠이 내려도 지독한 치욕은 그들을 비탄의 구덩이에 구겨 넣고 밟아 댈 것입니다. 입 안에서 으적으적 씹히는 모래, 이렇게 죽는구나 온 몸에 치욕을 밀어넣고 삼키며, 숨도 못쉬며 죽어가는구나. 죽어가는 늙은 말의 긴 속눈썹 젖은 물기. 거리는 단 한 점 미동도 없어, 다만 주점의 네온이 반짝 켜진다.

 

시집 『비열한 거리』(작가콜로퀴엄, 2003) 중에서

 

 


 

 

박미영 시인 /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잘 수 없지만, 그래도 결국 우리는 자고 만다*

 

 

  달빛 아래 너무 오래 잔 걸까

  오랑캐꽃 피었다

  자전거 끌고 힘겹게 언덕 올라오는 아버지

  흰 옷 걸친 가엾은 예수

  달빛 눈부셔 오랑캐꽃 씨방 둥글게 몸 부풀린다

 

  지금 또 잠들면 분명히 악몽을 꿀 거야

  아버지 달을 뭉개고 화약냄새 풍기는 편지를 디민다

  얼크러지는 달빛 먼 전쟁터 흙먼지처럼

  눈을 쏠고 지나간다 오랑캐꽃 푸른 씨방을 핥고 지나간다

  안, 녕,

  죽어가면서 너에게 쓴다

  그대여

 

  아, 아, 나는 너무 오래 잔 걸까

  아버지 자전거 밟고 간

  오랑캐 꽃잎 젖히자

  달빛 주르륵 흘러내린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소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기억하라』에서 인용

 

시집 『비열한 거리』(작가콜로퀴엄, 2003) 중에서

 

 


 

박미영 시인

대구에서 출생. 시집 『비열한 거리』(작가콜로퀴엄, 2003)로 등단. 현재 계간『낯선 시』의 편집장. ‘대구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