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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 비열한 거리
낡은 배낭 같은 말이 지나간다. 늙었다. 그 말의 눈매가 스치자 진실은 흰 천을 걷어낸 미이라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끔찍해서 모두 고개를 돌리고 말, 대화가 더러워졌다. 우리는 그 날 진실했을까. 사실만 말했던 걸까. 오래된 말가죽 냄새가 난다. 그들은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 거리조차 탈출할 수 없겠지만 결코 항복하지 않을 절망에 빠진 군대로 말입니다. 늙은 말이 거리의 단단한 바닥을 후벼팔 듯 턱을 부빈다. 김 오르는 여물처럼 피어오르는 먼지, 말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온 거리의 개가 다 짖는다. 채찍이 허공에서 멈춘다. 어둠이 내려도 지독한 치욕은 그들을 비탄의 구덩이에 구겨 넣고 밟아 댈 것입니다. 입 안에서 으적으적 씹히는 모래, 이렇게 죽는구나 온 몸에 치욕을 밀어넣고 삼키며, 숨도 못쉬며 죽어가는구나. 죽어가는 늙은 말의 긴 속눈썹 젖은 물기. 거리는 단 한 점 미동도 없어, 다만 주점의 네온이 반짝 켜진다.
시집 『비열한 거리』(작가콜로퀴엄, 2003) 중에서
박미영 시인 /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잘 수 없지만, 그래도 결국 우리는 자고 만다*
달빛 아래 너무 오래 잔 걸까 오랑캐꽃 피었다 자전거 끌고 힘겹게 언덕 올라오는 아버지 흰 옷 걸친 가엾은 예수 달빛 눈부셔 오랑캐꽃 씨방 둥글게 몸 부풀린다
지금 또 잠들면 분명히 악몽을 꿀 거야 아버지 달을 뭉개고 화약냄새 풍기는 편지를 디민다 얼크러지는 달빛 먼 전쟁터 흙먼지처럼 눈을 쏠고 지나간다 오랑캐꽃 푸른 씨방을 핥고 지나간다 안, 녕, 죽어가면서 너에게 쓴다 그대여
아, 아, 나는 너무 오래 잔 걸까 아버지 자전거 밟고 간 오랑캐 꽃잎 젖히자 달빛 주르륵 흘러내린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소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기억하라』에서 인용
시집 『비열한 거리』(작가콜로퀴엄, 200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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