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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렬 시인 / 프리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

이성렬 시인 / 프리즘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60년대 아주 추운 날 아침,

 

    유담뽀를 안은 채 잠이 깬 내 머리맡에 놓인,

 

    깊고 따뜻한 주머니를 가진,

 

    질기고 강한 고무줄을 두 겹 넣은,  

 

    내 다리보다 한 뼘이나 더 긴,

 

    대바늘 사이로 수많은 한숨이 무늬를 새겨 넣은,

 

    내 가슴 속 깊이 무지개의 화석으로 박힌,

 

    지금 흐린 겨울 하늘에 갑골문자로 눈물겨운,

 

    어머니가 뜨개질 부업에서 남긴 색색 털실로 짠,

 

    총천연색 얼룩말 무늬 스웨터 바지 한 벌

 

시집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중에서

 

 


 

 

이성렬 시인 / 그림자놀이

 

 

식구들과 여행을 갈 때마다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다. 러시안 룰레트에서 힌트를 얻은 이 놀이에 나는 온 귀의 신경을 팽팽히 곤두세우며 집중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알지 못하여 번번이 실패하였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신호는 민물장어처럼 귓바퀴를 빠져나갔을 뿐.

 

놀이의 비밀을 알아낸 것은 엉망으로 취한 대명콘도 지하상가에서였다. 신호음이 아니라 밑에 깔린 미세한 잡음이 모르스부호로 말하고 있음을. 무작위한 전자들의 움직임이 <적어도, 지금, 여기에>라고 속삭임을 분명히 들었고, 철학책을 뒤져가며 해독하는데 8개월이 걸렸다.

 

두 번째는 쿄토 금각사 근처 여관에서 <캪슐, 즐거움, 말미잘>이라는 단어들이 흘러나왔는데, 1년 반 후에 대전 술집에서 옆에 앉은 미대 아르바이트생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는 진화론의 대가인 스티븐 굴드 교수의 책에서나 읽은 듯한 <우연히, 直立猿人, 치질, 도도새>라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 은밀한 놀이는 그러나 제주 중문단지에서 송화기 구멍 사이로 내 음산한 목소리가 <출구, 덧없음, 不在>라고 내뱉었을 때, 목덜미에 돋은 소름과 함께 끝이 났다.

 

계간 『서정시학』 2003년 가을호 발표

 

 


 

이성렬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2002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가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웹진 『시인광장』 副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