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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영은 시인 / 오래 남는 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

강영은 시인 / 오래 남는 눈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시집 『녹색비단구렁이』(종려나무, 2008) 중에서

 

 


 

 

강영은 시인 / 우는 화살

 

 

사내는 몸속에서 울음을 꺼냈다 울음은 우는 화살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울음의 변방에 빗살무늬를 장치한 구름이 빗발쳤다

 

과녁을 향해 당겨지는 화살은 빗줄기의 연대, 피할 도리가 없으므로 그가 사랑한 사슴과 말과 여자는 붉은 悲哀, 피가 흥건했다

 

광대처럼 광대싸리나무 속에 울음을 가둔 그는 온몸이 화살통인 사내, 핏발 선 눈으로 뼈를 날려 보내는 사랑이 과녁이라면

 

흉노의 피를 지닌 그를 사랑하련다 오랑캐, 오랑캐 하고 부르면 말편자처럼 닳아 돌아오는 그를

 

붉은 울음 꺼이꺼이 토해내는 서녘을 밟고 일몰의 태양이 멀어진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일촉즉발의 활시위가 팽팽해진다

 

배를 갈라 울음을 꺼낸 단발명중은 살부림의 嚆矢

 

북방중원의 무덤 속인 듯 오후 6시의 과녁이 운다 몸이 떨리고 목젖이 운다 과녁을 삼킨 나의 화살은 그렇게 흐느낀다

 

시집 『최초의 그늘』(시안, 2011) 중에서

 

 


 

강영은 시인

제주에서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으로『녹색비단구렁이』(지혜사랑, 2008)와 『최초의 그늘』(시안, 2011) 등이 있음. 제8회 시예술상 우수작품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서울과학기술대학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