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꽃덤불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그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신문학>(1946)-
신석정 시인 / 들길에 서서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거니…….
-<슬픈 목가>(1947)-
신석정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촛불>(1939)-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균 시인 / 황혼가(黃昏歌) 외 2편 (0) | 2019.07.04 |
---|---|
오장환 시인 / 고향 앞에서 (0) | 2019.07.04 |
이호우 시인 / 달밤 (0) | 2019.07.03 |
장만영 시인 / 달·포도·잎사귀 (0) | 2019.07.03 |
한용운 시인 / 당신을 보았습니다 (0) | 2019.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