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인 / 황혼가(黃昏歌)
여기 낯익은 솔밭 사이사이에 들국화 가즈런―히 피어 있으나 하늘 한구석은 그냥 비어 있고나.
백만장안에 누가 살기에 오늘도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도 없이 해가 지느냐. 저물어 가는 나의 호수 호수 속 자욱―한 안개 속에서 등불이 하나 둘 깜박거린다.
우리 집 조그만 들창에도 불이 켜지고 저녁밥상에 어린것들이 지껄이리라. 내 그곳에 또 어두운 밤을 맞이하고 날이 밝으면 퇴색한 옷을 입고 거리로 가리라만 인마(人馬)와 먼지와 슬픔에 덮인 도시를 뚫고 나의 남은 반생의 길은 어디로 뻗쳐 있기에 낮과 밤이 들려주는 노래는 다만 한 줄기 오열뿐인가.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회귀(回歸)에의 헌시(獻詩)
용인땅 호암미술관 앞마당에 부르텔의 헤라크레스상(像)이 있고 그 옆에 이백 년 넘은 노목(老木)이 하나 서 있다. 수피(樹皮)는 풍파에 거칠고 뿌리도 패인 채 목이 잘린 나무가 머리를 숙이고 호수 위에 저물어 가는 가을 하늘을 받치고 있다.
울연(鬱然)히 하늘을 덮은 가지는 없어져도 나무에선 이조(李朝)의 바람 소리가 들리어 온다. 노수(老樹)에 봄이 오면 수피(樹皮)를 뚫고 나온 새 가지에 숲이 돋고 꽃이 핀다. 노수(老樹)는 기적같이 서서 부는 바람에 화분(花粉)을 뿌리고 앞뒤에 새로 자란 묘목 가운데 우뚝이 선다. 어느 날 태고의 바람에 날려온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유구백년(悠久百年) 생명의 노래를 부르나 보다.
아― 어느 사이 내 마음의 공동(空洞)에 노수(老樹)는 서서 밝아 오는 새벽을 향하여 두 손을 편다. 나무 위에는 한낮이면 새들이 날아와 노랠 부르고 황혼이 오면 고개를 떨구고 기도를 한다. 나는 나무를 믿고 나무는 나를 믿고 우리는 매일 밤 천년의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시인 / 흑설(黑雪)
늘어선 빌딩 사이 어두운 골목길에 아침부터 검은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불길한 소식을 가지고 황량한 도시의 지붕을 덮어 온다 촛불만한 희망을 안고 사는 시민들은 유리창 너머 내리는 눈발을 쳐다본다 눈발이 가져오는 불길한 소식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떨구고 생각한다.
검은 눈발은 흑사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그 눈발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창문을 닫고 숨을 죽인다. 언젠가는 일어나 싸울 것을 생각하면서
내리는 눈발 위에 쌓인 안개를 뚫고 정오의 종소리 멀리서 들려온다. 종탑에서 종탑으로 퍼져 가는 종소리 종소리는 시민들의 마지막 결의를 재촉하며 눈 내리는 도시의 천정 위에 퍼지어 간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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