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곁에 없어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7.

조병화 시인 / 곁에 없어도

 

 

길을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눈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목숨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생각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조병화 시인 / 개구리의 명상 16

 

 

사랑하며 배우며 가르치며

비바람 심한 이 거센 세월을, 서로

잠시 비켜서 쉬어가기 위하여

외로움, 즐거움, 그리움, 서로 주고 받으며

살아가옵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 서로를 갖고 싶을 정도로

사무치게 짙어지면, 서로 괴로워지니

서로 갖고 싶은 마음 애달프게 쓸쓸해지면

마음 아파도 그저 빙그레 웃으시오

사랑은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살아가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이 외로워지면 질투하는 마음으로 어두워지고

질투하는 마음이 고이거든

마음 공허하더라도 숨어서 혼자 울으시오

사랑은 질투가 아니기 때문에

 

아, 살아가면서 서로가 한없이 사랑이 뜨거워지면

서로 소유하고 싶은 마음, 질투하는 마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잠시도 견디기 어려운 마음,

어찌 생기지 아니하리오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한없이 곱고 뜨거운 그리움이어서

그리운 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그저 그만큼 그리움으로 숨어서 우는 일이옵니다.

 

 


 

 

조병화 시인 / 가을비

 

 

무슨 전조처럼 온종일

가을비가 구슬프게 주룩주룩 내린다

 

나뭇잎이 곱게 물들다 시름없이

떨어져서 축축히 무심코

여기 저기 사람들에게 밟힌다

 

순식간에 형편 없이 찢어져서

꼴사납게 거리에 흩어진다

 

될대로 되어라, 하는 듯이

 

그렇게도 나뭇가지 끝에서

가을을 색깔지어 가던 잎새들도

땅에 떨어지면, 그뿐

흔들이 버리고 간 휴지조각 같다

 

아, 인간도 그러하려니와

언젠가는 나의 혼도 그렇게 가을비 속에

나를 버리고 어디론지 훌쩍 떠나 버리겠지,

하는 생각에 나를 보니

 

나도 어느새, 가을비를 시름없이

촉촉히 맞고 있었다.

 

 


 

 

조병화 시인 / 가물거리는 그 이름

 

 

만남이 뜸하면

그 얼굴도 멀어지고

그 이름도 뜸해진다

 

둥근 가을달처럼 떠오르는

그 얼굴

가물거리는 그 이름

 

그립던 마음도

사무치던 마음도

까칠까칠, 저무는 바람아

 

저물수록 온 몸에 가득히

떠오르는 둥근 그 얼굴

 

아, 지금은.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