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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홍윤숙 시인 / 타관의 햇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9.

홍윤숙 시인 / 타관의 햇살

 

 

석양(夕陽)이

먼 곳에서 혼자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객지(客地)에 있고

며칠이면 귀향(歸鄕)의 낡은 마차(馬車)가

이 마을 어귀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여관(旅館) 뜰에 버려진 여름의 잔해(殘骸)를

실어낼 것이다.

잠잠히 떨고 섰는 안개 속의

저것을…….

 

그것들은 조금씩 떨며 밤을 기다리고

우리는 한 철 열어 놓은

장원(莊園)의 문(門)에

무거운 빗장을 꽂으려 내려간다.

후회와 불안(不安)의 긴 그림자를 끌고.

 

이윽고 깊은 어둠 속에

우리가 지새던

덧없는 타관(他關)의 여름 날을 버려두고

귀향(歸鄕)의 낡은 마차(馬車)는 떠나리라.

 

겨울 해 떨어진

어디라 이름할 수 없는 고향의 정거장(停車場)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원(永遠)을 향해

길고 긴 편지를 쓰리라, 대답없는 편지를.

 

유리관(棺) 같은 진공(眞空)의 하늘 아래

무겁게 가라앉은 생명의 실체(實體)

그 차디찬 실존(實存)의 층계(層階)를 내려가리라.

그리고 최후로 보리라

자연(自然)의 과실(果實)은 땅으로 가는 것을.

 

석양(夕陽)이

먼 곳에서 혼자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객지(客地)에 있고

며칠이면 귀향(歸鄕)의 저녁 마차(馬車)가

이 마을 어귀에 도착할 것이다.

 

 


 

 

홍윤숙 시인 / 오라 이 강변으로

 

 

오라, 이 강변으로.

우리는 하나, 만나야 할 한 핏줄,

마침내 손잡을 그 날을 기다린다.

그 날이 오면, 끊어진 허리

동강난 세월들 씻은 듯 나으리라.

너의 주름과 나의 백발도

이 땅의 아름다운 꽃이 되리라.

오늘도 여기 서서 너를 기다린다


경의선 보통열차, 1989

 

 


 

 

홍윤숙 시인 /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가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끔 눈 쌓이고, 쌓인 눈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 달 열흘 숨겨 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 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홍윤숙 시인 / 낙엽의 노래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달빛도 기울어진 산(山)마루에

낙엽(落葉)이 우수수 흩어지는데

(山)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긴 그림자

슬픈 그림자를 내 잊지 않으마

 

언젠가 그 밤도 오늘 밤과 꼭같은

달밤이었다

바람이 불고 낙엽(落葉)이 흩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길을 잃은 밤

 

너는 별을 가리켜 영원(永遠)을 말하고

나는 검은 머리 베어 목숨처럼 바친

그리움이 있었다 혁명이 있었다

 

몇 해가 지났다

자벌레처럼 싫증난 너의 찌푸린 이맛살은

또 하나의 하늘을 찾아 거침없이

떠나는 것이었고

 

나는 나대로 송피(松皮)처럼 무딘 껍질밑에

무수한 혈흔(血痕)을 남겨야 할 아픔에

견디었다

 

오늘 밤 이제 온전히 달이 기울고

아침이 밝기 전에 가야 한다는 너..

우리들이 부르던 노래 사랑하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부르자

 

희뿌여히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

닭이 울면 이 밤도 사라지려니

 

어서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너와 나 낙엽을 밟으며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홍윤숙 시인 (洪允淑, 1925년-2015년)

호는 여사(麗史)이다. 1925년 8월 19일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로 이주하여 동덕여자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서 수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47년 『문예신보』에 「가을」을 발표하였고,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원정(園丁)」이 당선되었다. 1962년 첫 시집 『여사시집』은 부산 피난 당시 스승이 지어준 여사(麗史)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초기시들은 한국전쟁의 역사현실에서 시인의 의지를 최대한 발휘하여 전쟁의 폐허를 두고 쓴 것이다. 김명순, 노천명, 모윤숙으로 이어지는 여성 시인의 계보에서 1950년대 여성시의 위상을 강화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1994년 보관문화훈장. 공초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구상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