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숙 시인 / 타관의 햇살
석양(夕陽)이 먼 곳에서 혼자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객지(客地)에 있고 며칠이면 귀향(歸鄕)의 낡은 마차(馬車)가 이 마을 어귀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여관(旅館) 뜰에 버려진 여름의 잔해(殘骸)를 실어낼 것이다. 잠잠히 떨고 섰는 안개 속의 저것을…….
그것들은 조금씩 떨며 밤을 기다리고 우리는 한 철 열어 놓은 장원(莊園)의 문(門)에 무거운 빗장을 꽂으려 내려간다. 후회와 불안(不安)의 긴 그림자를 끌고.
이윽고 깊은 어둠 속에 우리가 지새던 덧없는 타관(他關)의 여름 날을 버려두고 귀향(歸鄕)의 낡은 마차(馬車)는 떠나리라.
겨울 해 떨어진 어디라 이름할 수 없는 고향의 정거장(停車場)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원(永遠)을 향해 길고 긴 편지를 쓰리라, 대답없는 편지를.
유리관(棺) 같은 진공(眞空)의 하늘 아래 무겁게 가라앉은 생명의 실체(實體) 그 차디찬 실존(實存)의 층계(層階)를 내려가리라. 그리고 최후로 보리라 자연(自然)의 과실(果實)은 땅으로 가는 것을.
석양(夕陽)이 먼 곳에서 혼자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객지(客地)에 있고 며칠이면 귀향(歸鄕)의 저녁 마차(馬車)가 이 마을 어귀에 도착할 것이다.
홍윤숙 시인 / 오라 이 강변으로
오라, 이 강변으로. 우리는 하나, 만나야 할 한 핏줄, 마침내 손잡을 그 날을 기다린다. 그 날이 오면, 끊어진 허리 동강난 세월들 씻은 듯 나으리라. 너의 주름과 나의 백발도 이 땅의 아름다운 꽃이 되리라. 오늘도 여기 서서 너를 기다린다
경의선 보통열차, 1989
홍윤숙 시인 /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가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끔 눈 쌓이고, 쌓인 눈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 달 열흘 숨겨 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 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홍윤숙 시인 / 낙엽의 노래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달빛도 기울어진 산(山)마루에 낙엽(落葉)이 우수수 흩어지는데 산(山)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긴 그림자 슬픈 그림자를 내 잊지 않으마
언젠가 그 밤도 오늘 밤과 꼭같은 달밤이었다 바람이 불고 낙엽(落葉)이 흩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길을 잃은 밤
너는 별을 가리켜 영원(永遠)을 말하고 나는 검은 머리 베어 목숨처럼 바친 그리움이 있었다 혁명이 있었다
몇 해가 지났다 자벌레처럼 싫증난 너의 찌푸린 이맛살은 또 하나의 하늘을 찾아 거침없이 떠나는 것이었고
나는 나대로 송피(松皮)처럼 무딘 껍질밑에 무수한 혈흔(血痕)을 남겨야 할 아픔에 견디었다
오늘 밤 이제 온전히 달이 기울고 아침이 밝기 전에 가야 한다는 너.. 우리들이 부르던 노래 사랑하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부르자
희뿌여히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 닭이 울면 이 밤도 사라지려니
어서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너와 나 낙엽을 밟으며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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