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적
- 네 만일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는 사랑이 아니니라. 너의 적을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복음서』
1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 나는 이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음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멋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너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러운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
2 때로 내가 이 수학 공부에 게을렀을 때, 적이여! 너는 칼날을 가지고 나에게 근면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무모한 돌격을 시험했을 때, 적이여! 너는 아픈 타격으로 전진을 위한 퇴각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비겁하게도 진격을 주저했을 때, 적이여! 너는 뜻하지 않는 공격으로 나에게 전진을 가르치었다. 만일 네가 없으면 참말로 사칙법(四則法)도 모를 우리에게, 적이여! 너는 전진과 퇴각의 고등 수학을 가르치었다. 패배의 이슬이 찬 우리들의 잔등위에 너의 참혹한 육박이 없었다면, 적이여! 어찌 우리들의 가슴속에 사는 청춘의 정신이 불탔겠는가? 오오! 사랑스럽기 한이 없는 나의 필생의 동무 적이여! 정말 너는 우리들의 용기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 복음서는 나의 광영이다.
『현해탄』 , 임화, 열린책들, 2004년, 113~115쪽
임화 시인 / 네거리의 순이(順伊)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임화 시인 / 한 잔 포도주를
찬란한 새 시대의 향연(饗宴) 가운데서 우리는 향그런 방향(芳香) 우에 화염같이 붉은 한 잔 포도주를 요구한다
새벽 공격의 긴 의논이 끝난 뒤 야영은 뼛속까지 취해야 하지 않느냐
명령일하(命令一下)
승리란 싸움이 부르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나 나는 또한 패배를 후회하지 않는다 승패란 자고로 싸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로하지 않는 것이다 적*에 대한 미움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최후의 결별에 임하여 무엇 때문에 한 그릇 냉수로 흥분을 식힐 필요가 있느냐 벗들아! 결코 위로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된다
동백꽃은 희고 해당화는 붉고 애인은 그보다도 아름답고 우리는 고향의 단란과 고요한 안식을 얼마나 그리워하느냐 아 이러한 모든 속에서 떠나가는 슬픔을 나는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잔 냉수로 머리를 식힌 채 화려했던 희망과 꿈이 묻히는 무덤을 찾느니보단 아! 내일 아침 깨어지는 꿈을 위해설지라도 꽃과 애인과 승리와 패배와 원수까지를 한 정열로 찬미할 수 있는 우리 청춘을 위하여 벗들아! 축복의 붉은 술잔울 들자
『조선지광』 82호, 19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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