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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경숙 시인 / 菊花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9.

고경숙 시인 / 菊花池*

 

 

  화선지에 살짝 낚싯대를 드리워

  농담(濃淡)을 조절해보세요

  저녁이 느리게 번져와요

  바람이 대숲을 건드려 붓질을 하면

  한 송이 국화로 피는 수상좌대

  목뼈가 저리도록

  물속에 코를 빠뜨리고 있는 저 남자

 

  먹물방울로 맺힙니다

  고개 돌려 술 한 잔 건넬

  벗 하나 없는 저녁,

  고인 저수지의 울음은 슬픈 여자를 닮았어요

  국화꽃잎 하나씩 떼어내 물에 떨궈요

  갈기갈기 부숴지는 물을 보세요

  물고기로 化한 꽃잎의 기억들이 요동치네요

  조사(釣師)들은 원래 곁눈질을 안 하지만

  수작 부리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저 남자, 월척은 그른 것 같네요

  어둠이 저수지에 덧칠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침하는 꽃방엔

  국화향 가득 물안개로 피어오르는걸요.

 

*국화지: 강화도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저수지

 

반년간 『시산맥』 2009년 창간(상반기)호 발표

 

 


 

 

고경숙 시인 / 보티첼리를 읽는 밤

-Venus-

 

 

  틀어진 각도로 서있는 그녀는 금세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서풍의 신, 새벽의 신이 서녘을 향해 힘껏 바람을 불어댄다

  붉은 긴 머리로 아슬아슬하게 그곳을 가린 그녀

  오래된 서사가 소외되어 있다

 

  적어도 붉은 장미로 치장한 침대는 아니더라도

  나른한 바람을 덧입히며 기대했던 그녀의 표정은

  행복에 즈음했어야 했다

 

  공중을 향해 장미 한 다발을 던져라

 

  새벽의 신이 다급히 외쳤다

 

  비린 조개안에서 그녀의 맨발이 더듬더듬 무엇인가를 찾다가

  급한 물살에 휘청거린다

 

  비너스, 그녀의 시선이 서러운 나체를 못 따라가고

  당신도 손을 내밀지 않았으므로

  오늘은 그녀를 안을 수 없다

 

  비대칭의 어깨에 내려앉은 혼탁한 어둠을 걷어내려고

  밤이 헤프게 안료를 풀어댔다

  시간차이를 두고 일어났던 그녀의 과거가

  동일한 공간에 열거되고

  돌아선 군주에게 보낼 편지를 들려 길 나서는 몸종따라

 

  사랑, 관능 따위같은 하찮은 소재들이

  몸을 들썩였다

 

계간 『시인정신』 2011년 여름호 발표

 

 


 

고경숙 시인

1961년 서울에서 출생. 2001년 《시현실》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모텔 캘리포니아』(문학의전당, 2004)와 『달의 뒤편』(문학의전당, 2008) 이 있음. 제4회 하나.네디앙 인터넷문학상 대상, 제2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제3회 두레문학상 , 2011 경기예술인상, 2012년 제3회 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부천문협 부지부장, 부천여성문학회장, 시산맥.두레문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