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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동윤 시인 / 덕거리의 겨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9.

임동윤 시인 / 덕거리의 겨울

 

 

  울진행 막차는 끝내 오지 않았다

  사흘 밤 사흘 낮을

  지새는 눈발은 좀처럼 그치지 않고

  가마솥 쇠죽 쑤는 아궁이마다

  잘 마른 참나무 장작 몇 덩이 던져 넣으며

  나는 추억처럼 아득한 시간들을

  그리운 이름들로 불러보았다

 

  초가지붕 추녀까지 뒤덮으면서

  통고산 멧돼지 배고픔으로

  그냥 지쳐 마을까지 밀려오면서

  눈보라 속 모든 길은 보이지 않고

  시작과 끝이 매몰되었다

 

  여섯 자 세 치 몸 빠지는 눈구렁 속

  우물길 찾던 아지매들 쿨룩쿨룩 잠들고

  가마솥마다 펄펄 끓어 넘치는

  옥수수 깡마른 대궁들

  활활 타오르는 참나무 숯불 위에

  번뜩이는 적의, 분노의 칼날이여

 

  옥수수 깡마른 대궁만 질겅질겅 씹어

  되새김질하는 부사리의 한숨도

  더러는 사는 일이

  퉁퉁 불은 통나무 쪼개는 일보다

  더 질기고 아프다는 것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가마솥마다 도토리가 삶겨서

  미움의 떫은맛도 가시고 한 덩이 묵으로

  눈뜰 때쯤 제 무게에 겨워

  쿵쿵 허리 부러져 나자빠지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여

  쿵쿵 허리 부러져 눕는

  신음소리는 야트막히 하늘 떠돈다

 

  날개 짧은 새 한 마리

  눈 녹는 굴뚝 언저리로 숨고

  식어가는 아궁이마다

  잘 마른 참나무장작 몇 덩이 던져넣으며

  밤새도록 나는

  아픈 추억의 그리운 순간들을

  따뜻한 얼굴들로 지피고 있다

 

1992년 청구문화제 시 대상 수상작품

 

 


 

 

임동윤 시인 / 나무아래서

 

 

  아버지는 죽어서도 여전히 키 큰 나무다

  피가 돌지 않는 아랫도리는 썩고

  그 곳으로 벌레들이 몰려와 집을 짓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한 적이 없다

  가지마다 연둣빛 자식들을 올망졸망 매달고

  크고 탐스러운 열매들을 키워내는 가을이면

  아버지는, 한 그루 풍성한 세상의 나무였다

  그러던 나무가 갑자기 잎을 떨궈버렸다

  바지런히 물 뽑아 올리던 뿌리도 말라버리고

  햇빛 맘껏 끌어당기던 연둣빛 눈들이

  시들시들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바람 많은 세상의 무수한 죽음 중에서

  모든 소임을 다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

  그 성스런 최후가 무척 평온한 듯 보였다

  아버지를 닮는 것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가자면

  비바람 모진 세월 오래 견뎌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내가 짓는 집들은 너무 작고

  눈보라를 감당하기엔 아직 허술하다는 것을

  이 고요한 아버지의 비밀을 엿보려고

  바람은 국망봉까지 찾아와

  푸른 잔디의 등을 부지런히 쓰다듬는다  

  가난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잎을 피운,

  단단한 열매로 세상을 장식한 저 나무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거룩한 희생임을

  나는 안다, 바람 많은 날 뒤돌아보면

  여전히 아버지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을

 

2002년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시

 

 


 

임동윤 시인

1948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 1992년 《문화일보》(시조) 신춘문예와 1996년 《한국일보》(시)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은빛 마가렛』, 『연어의 말』,『나무 아래서』, 『따뜻한 바깥』 등이 있음. 2002년 수주문학상 대상, 김만중문학상 수상. 현재 『시와소금』 발행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