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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산협(山峽)의 노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4.

오장환 시인 / 산협(山峽)의 노래

 

 

 이 추운 겨울 이리떼는 어디로 몰려다니랴.

첩첩이 눈 쌓인 골짜기에

재목을 싣고 가는 화물차의 철로가 있고

언덕 위 파수막에는

눈 어둔 역원이 저녁마다 램프의 심지를 갈고.

 

포근히 눈은 날리어

포근히 눈은 내리고 쌓이어

날마다 침울해지는 수림(樹林)의 어둠 속에서

이리떼를 근심하는 나의 고적은 어디로 가랴.

 

눈보라 휘날리는 벌판에

통나무 장작을 벌겋게 지피나

아 일찍이 지난날의 사랑만은 따스하지 아니하도다.

 

배낭에는 한 줌의 보리 이삭

쓸쓸한 마음만이 오로지 추억의 이슬을 받아 마시나

눈부시게 훤한 산등을 내려다 보며

홀로이 돌아올 날의 기꺼움을 몸가졌노라.

 

눈 속에 싸인 골짜기

사람 모를 바위틈엔 맑은 샘이 솟아나고

아늑한 응달녘에 눈을 헤치면

그 속에 고요히 잠자는 토끼와 병든 사슴이.

 

한겨울 내린 눈은

높은 벌에 쌓여

나의 꿈이여! 온 산으로 벋어 나가고

어디쯤 나직한 개울 밑으로

훈훈한 동이가 하나

온 겨울, 아니 온 사철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

 

한동안 그리움 속에

고운 흙 한 줌

내 마음에는 보리 이삭이 솟아났노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종가

 

 

돌담으로 튼튼히 가려 놓은 집안엔 검은 기와집 종가가 살고 있었다. 충충한 울 속에서 거미알 터지듯 흩어져 나가는 이 집의 지손(支孫)들. 모두 다 싸우고 찢고 헤어져 나가도 오래인 동안 이 집의 광영을 지키어 주는 신주(神主)들 들은 대머리에 곰팡이가 나도록 알리어지지는 않아도 종가에서는 무기처럼 애끼며 제삿날이면 갑자기 높아 제상 위에 날름히 올라 앉는다. 큰집에는 큰아들의 식구만 살고 있어도 제삿날이면 제사를 지내러 오는 사람들 오조할머니와 아들 며느리 손자 손주며느리 칠촌도 팔촌도 한테 얼리어 닝닝거린다. 시집 갔다 쫓겨 온 작은딸 과부가 되어 온 큰고모 손가락을 빨며 구경하는 이종언니 이종오빠. 한참 쩡쩡 울리던 옛날에는 오조할머니 집에서 동원 뒷밥을 먹어 왔다고 오조할머니 시아버니도 남편도 동네 백성들을 곧잘 잡아들여다 모말굴림도 시키고 주릿대를 앵기었다고. 지금도 종가 뒤란에는 중복사나무 밑에서 대구리가 빤들빤들한 달걀귀신이 융융거린다는 마을의 풍설. 종가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일을 안 해도 지내 왔었고 대대손손이 아무런 재주도 물리어받지는 못하여 종가집 영감님은 근시안경을 쓰고 눈을 찝찝거리며 먹을 궁리를 한다고 작인들에게 고리대금을 하여 살아 나간다.

 

<풍림, 1937. 제 3호.>

 

 


 

 

오장환 시인 / 모촌(暮村)

 

 

초라한 지붕 썩어 가는 추녀 위엔 박 한 통이 쇠었다.

밤 서리 차게 내려앉는 밤, 시들하던 넝쿨이 사그라 붙던 밤, 지붕 밑 양주(1)는 밤새워 싸웠다.

박이 딴딴이 굳고 나뭇잎새 우수수 떨어지던 날, 양주는 새 바가지 뀌어 들고 초라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가 덮인 움막을  작별하였다.

 

 주 (1)양주(兩主): 바깥 주인과 안주인이라는 뜻으로, 부부를 이르말

 

출전 '시인 부락'(1936)

 

 


 

 

오장환 시인 / 소야(小夜)의 노래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더러운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 기울어 낙엽송에 쌓인 눈 바람에 흐트러지고

산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에 내려 비애를 적시울 듯

도형수(徒形囚)의 발은 무겁다.

 

[주] (1)도형수(徒刑囚):오형(五刑)의 하나. 1년에서 3년까지의 복역

 

'사해공론'(1938)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