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전아사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 (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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