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전아사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5.

신석정 시인 / 전아사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

(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신석정  [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 ·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8 ·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