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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이체 시인 / 유언연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1.

이이체 시인 / 유언연습

 

 

두 노예의 사랑은 이렇게 전승된다. 벽화에도 그려질 수 없던 원죄의 실패한 연애담. 죽은 나무 속을 개들이 핥는 숲이었다. 따스한 햇볕조차 막연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자꾸 헛발을 내디뎌 비척거리면서 그들의 피부를 옅게 데워주었다. 그들은 보랏빛으로 퇴폐하는 환영을 보았으나 외면하는 습관을 떠올릴 뿐. 한 노예가 제 살 위의 햇살을 조금 옮겨다가 다른 노예의 두 볼에 발라주었다. 달이 네 눈으로 옮아가기를. 얼음수도원에서 울려 퍼지던 어느 교성의 색채를 음미하면서. 몸을 갖지 못한 시간에게 기억을 한 움큼 내주고, 숲은 안식일을 얻어서 약간씩만 교만해졌다. 노예들은 십자가 꽂힌 공동묘지 그림을 기억해냈다. 날 당신의 내부에 들여보내주지 않을 거죠? 히죽거리며 눈치 보는 곱사등이들을 상상한다. 불량한 충고를 주워들으며 섹스하는 것 같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서 노예들은 각자 다른 나무 뒤에 숨었다. 개들은 사라지고 개들의 이빨만 남았다. 과묵한 독방에 소외되었다.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이이체 시인 / 추락한 부엌

 

 

이곳은 매우 슬프고 아늑하다. 비행운이 없이도 날 수 있는 하늘의 귀퉁이다. 휑뎅그렁한 부엌이라고 해도 좋다. 이건 포크고 이건 의자고. 그런데 왜 이렇게 텅 빈 거지. 이어폰을 끼우지 않은, 네가 억지로 밥 먹는 소리. 나는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청회색 정서가 싫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넘치는 이야기들, 그 축축한 식도락. 부엌에서 종이비행기를 접시에 담고 너에게 포크로 자르기를 요구했었지. 미안해요. 나는 발자국도 없이 가벼운 사람. 무단투기된 언어들이 하필이면 부엌으로 몰려만 가는가. 지구의 한 조각을 손에 쥐고 사는 것이 이토록 서럽더라니. 우걱우걱 구겨 넣는 밥 한 숟가락은 비행기 안의 멀미만큼 어지럽고. 하늘에서 구름조각들을 잡아다가 먹어본 일이 있다. 시궁창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다리를 감싸고 있다. 노래로 감출 만한 슬픔들을 거울에 비춰보고 싶다. 모든 비행기들은 지구의 한 조각만을 떠돌 따름이고. 무모하게 눈부신 내 사랑, 미안해요, 같이 만져요. 너를 만져도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을 느낀다. 고개를 수그린다.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이이체 시인

198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2008년 《현대시》에 〈나무 라디오〉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죽은 눈을 위한 송가』(문학과지성사, 2011)가 있음.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