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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이듬 시인 / 문학적인 선언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1.

김이듬 시인 / 문학적인 선언문

 

 

  '사랑스러워'를 '사랑해'로 고쳐 말하라고 소리 질렀다

  밥 먹다가 그는 떠났다

  사랑스러운 거나 사랑하는 거나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나

 

  죽은 친구를 묻기 전에

  민첩하게 그 슬픔과 분노를 시로 쓰던 친구의 친구를 본 적 있다

  그 정신에 립스틱을 바르고

  난 멍하니 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인은 시인다워야 하나

 

  오늘 나는 문학적인 선언문을 고민한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이미 써서 카페에 올렸다

  주저 말고 서둘러야 한다

  적이 문제다

 

  'ㅡ적(的)'은 '-다운,-스러운'의 의미를 가진 접사인데

  '문학적(文學的)'이라는 말

  문학적 죽음, 문학적 행동, 문학적 선언, 시적 인식, 시적인 소설

  나는 지금 시적으로 시를 쓸 수 없구나

 

  문학적인 선언문을 쓰자는 말은

  왕에게 속한 신성한 것을 그냥 불러서는 안 되는 폴리네시아 인처럼

  은유로 도피하거나

  수사적 비유를 쓰라는 말은 아닐 텐데

  나는 한 줄 쓰는 데 좌절하고 애통함에 무기력하다

 

  그리하여 난 또다시 적的의 문제로 적敵을 만들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시적이지 않은 시를 쓰며

  시인답지 못하게 살다

  문학적이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길 빈다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김이듬 시인 /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내 열쇠는 피를 흘립니다 내 사전도 피를 흘립니다 내 수염도 피를 흘리고 저절로 충치가 빠졌습니다 내 목소리는 굵어지고 주름도 굵어지고 책상 서랍의 쥐꼬리는 사라졌습니다 소문대로 난 일  년의 절반을 지하실과 지상에서 공평하게 떠돕니다

 

나의 눈에서 물이 흐릅니다 한쪽 눈알은 말라빠졌습니다 두 다리의 무릎까지만 털이 수북합니다 음부의 반쪽에선 피가 나오고 오른쪽 사타구니엔 정액이 흘러내립니다 백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만

 

하하하 농담 그냥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라는 말을 요즘 유행하는 환상적 어투로 지껄인 겁니다 말도 하기 귀찮다는 예 바로 그 말이죠

 

자자 내게 제모기와 쥐덫은 그만 보내시고요 이가 들끓는 가발도 처치 곤란입니다 도려서 얹어놓은 과일들 이 모든 쓰레기는 충분해요 머리맡에 양초든 향이든 피우지 마세요 죽겠네 정말 꽃 무더기 따위 묶어오지 말라니까요

 

죽은 장미가 그랬죠 너는 아름답구나

 

지금은 뼈만 남은 늙은이와  놀다 쉬는 참입니다 매일 한두 명과 그러고 그러지만 어떤 날은 여자 애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정신이 나갑니다 공동묘지로 허가 났나요 전기가 끊어지고 수도관이 막힌 지도 한참 됐어요 하긴 정신차린다는 말의 뜻도 모르지만 제발 축언은 닥치고요 축복도 그만 좀 주세요

 

지하실엔 매달 공간이 없답니다 정원에도 파묻을 자리가 없구요 누군 나더러 불러들였다는데 제 발로 찾아와 발가벗는데 난들 별 수 있나요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내게 없는 걸로 주세요 가령 고통이니 절망 허무랄까 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전에만 있는 그 말뜻이 통하게요 안 될까요 그럼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흔해빠진 문구를 써먹을 수 있는 상황이랄까 혹은 질투라는 단어에 적합한 대상을 보내주세요

 

누가 봤을까요 나도 날 못 봤는데  그러나 나는 아름다워요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 2007) 중에서

 

 


 

김이듬 시인

2001년 《포에지》를 통해 등단. 부산대 독문과 및 경상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저서로는 시집으로『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과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 2007), 『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11)  그리고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문학동네, 2011)이  있음. 현재 경상대 국문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