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임 시인 / 아름다운 연애
세계는 한여름 광장의 낡은 벤치 나는 그곳에 걸쳐진 두꺼운 외투
너무 어울리지 않아 연애밖에 할 것이 없다
내가 너에게 입 맞추는 순간 집의 창문, 종려나무에 흘러내리는 빛, 혹은 서늘하게 반짝이는 침엽수림
나침반도 없이 욕설도 찬사도 없이
우리의 입술들을 반죽해서 빵을 굽고 빵을 나누어주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약한 자들과 교활한 자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심부름꾼들과 정치가, 성직자와 사기꾼 색정광과 전쟁광과 강박적인 시민들 과학자들과 장사꾼들과 시한부 환자들과 감상주의자와 염세주의자들 어릿광대와 유령들과 철학자들 예술가와 어린아이들과 죽은 사람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빵을 먹는다
빵은 늘 모자라고 식사는 불평 속에서 끝난다
세계는 한여름 광장의 낡은 벤치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무력해서 연애밖에 할 것이 없다
내가 너에게 입 맞추는 순간 하얀 비둘기 뫼비우스의 띠, 혹은 서로를 핥아주는 고래들이 살고 있는 바다
시집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관용 시인 / 여행지의 의자들 외 2편 (0) | 2019.10.01 |
|---|---|
| 이혜미 시인 / 보라의 바깥 외 1편 (0) | 2019.09.30 |
| 김사람 시인 / 밴드 만들기 외 1편 (0) | 2019.09.30 |
| 최라라 시인 / 이것은 어느 날의 코미디 외 1편 (0) | 2019.09.30 |
| 이가을 시인 / 북소리 외 1편 (0) | 2019.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