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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임 시인 / 아름다운 연애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30.

이경임 시인 / 아름다운 연애

 

 

  세계는 한여름 광장의 낡은 벤치

  나는 그곳에 걸쳐진 두꺼운 외투

 

  너무 어울리지 않아

  연애밖에 할 것이 없다

 

  내가 너에게 입 맞추는 순간

  집의 창문, 종려나무에 흘러내리는 빛,

  혹은 서늘하게 반짝이는 침엽수림

 

  나침반도 없이

  욕설도 찬사도 없이

 

  우리의 입술들을 반죽해서 빵을 굽고

  빵을 나누어주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약한 자들과 교활한 자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심부름꾼들과 정치가, 성직자와 사기꾼

  색정광과 전쟁광과 강박적인 시민들

  과학자들과 장사꾼들과 시한부 환자들과 감상주의자와 염세주의자들

  어릿광대와 유령들과 철학자들

  예술가와 어린아이들과 죽은 사람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빵을 먹는다

 

  빵은 늘 모자라고

  식사는 불평 속에서 끝난다

 

  세계는 한여름 광장의 낡은 벤치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무력해서

  연애밖에 할 것이 없다

 

  내가 너에게 입 맞추는 순간

  하얀 비둘기 뫼비우스의 띠,

  혹은 서로를 핥아주는 고래들이 살고 있는 바다

 

시집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이경임 시인

1963년 서울에서 출생. 서강대 영문과와 전남대 대학원 영문과를 졸업. 1997년《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드러운 감옥>이 입선되어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 『부드러운 감옥』(문학과지성사, 1998)과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문학과지성사,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