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장별리(將別里)
연분홍 저고리, 빨간 불붙은 평양에도 이름 높은 장별리 금실 은실의 가는 비는 비스듬히도 내리네, 뿌리네.
털털한 배암 무늬 돋은 양산에 내리는 가는 비는 위에나 아래나 내리네, 뿌리네.
흐르는 대동강, 한복판에 울며 돌던 벌새의 떼무리, 당신과 이별하던 한복판에 비는 쉴 틈도 없이 내리네, 뿌리네.
1922. 7
김소월 시인 / 저녁때
마소의 무리와 사람들은 돌아들고, 적적히 빈 들에, 엉머구리 소리 우거져라.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추, 먼 산 비탈길 어둔데 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여라.
볼수록 넓은 벌의 물빛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고개 수그리고 박은 듯이 홀로 서서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온 것을 아주 잊었어라, 깊은 밤 예서 함께 몸이 생각에 가비엽고, 맘이 더 높이 떠오를 때. 문득, 멀지 않은 갈숲 새로 별빛이 솟구어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제비
하늘로 날아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 일정한 깃을 두고 돌아오거든! 어찌 섧지 않으랴, 집도 없는 몸이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집 생각
산에나 올라서서 바다를 보라 사면에 백여 리, 창파(滄波) 중에 객선만 중중…… 떠나간다.
명산대찰이 그 어느메냐 향안(香案), 향탑(香榻), 대그릇에 석양이 산머리 넘어가고 사면에 백여 리, 물소리라
`젊어서 꽃 같은 오늘날로 금의(錦衣)로 환고향(還故鄕)하옵소서.' 객선만 중중…… 떠나간다 사면에 백여 리, 나 어찌 갈까
까투리도 산 속에 새끼 치고 타관만리에 와 있노라고 산중만 바라보며 목메인다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고
들에나 내려오면 치어다보라 해님과 달님이 넘나든 고개 구름만 첩첩…… 떠돌아간다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찬 저녁
퍼르스럿한 달은, 성황당의 군데군데 헐어진 담 모도리에 우둑히 걸리었고, 바위 위의 까마귀 한 쌍, 바람에 나래를 펴라.
엉기한 무덤들은 들먹거리며, 눈 녹아 황토 드러난 멧기슭의, 여기라, 거리 불빛도 떨어져 나와, 집 짓고 들었노라, 오오 가슴이여
세상은 무덤보다도 다시 멀고 눈물은 물보다 더더움이 없어라. 오오 가슴이여, 모닥불 피어오르는 내 한세상 마당가의 가을도 갔어라.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나는 소리를 들어라 눈석이물이 씨거리는 땅 위에 누워서, 밤마다 누워 담 모도리에 걸린 달을 내가 또 봄으로.
진달래꽃, 매문사,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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