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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수호 시인 / 이불 무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8.

천수호 시인 / 이불 무덤

 

 

  우리 집 이불 속 역사는 약사(略史)로만 전해진다

  저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아이를 잉태했었는지도

  저걸 덮고 큰언니가 죽어나간 일도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간단한 엄마의 말로 요약되어

  가끔 끙, 하는 신음 속에만 묻어나올 뿐

  완전한 진실은 다 묻혔다

  어린 내 발등에 차인 아버지 밥그릇이 두어 번 발라당 넘어졌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카락을 떼고 밥그릇을 다 비우셨고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절절 끓는 온기가 내 발끝을 자주 녹였다는 것도

  묵인된 역사였다

  누구 발등인지 모를 매끈한 살결에

  은근히 발을 잇대기도 했고

  그 촉감만큼 매끄러운 눈물도 이불속에서는 잘 묻혔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 속에서 자랐고

  이불 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따글 씨앗처럼 여물어졌어도

  이불은 아직 색동무늬 밑에 그 뼈다귀들을 묻어놓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7년 5월호 발표

 

 


 

천수호 시인

196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으로 『아주 붉은현기증』(민음사, 2009)와 『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명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