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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 거대한 빵
이 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빵입니다
비법이 뭐냐구요? 매일 반죽을 조금씩 떼어두었다가 다음 날의 반죽에 섞는 것, 발효는 그렇게 은밀히 계승되어왔습니다
오늘도 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빵 속의 터널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은 같은 빵을 먹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식구라 부릅니다
밀가루로 된 벽과 지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러나 이 거대한 빵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도 빵을 먹어 들어오는 저 왕성한 소리가 들리십니까?
이미 한쪽에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그래도 아직 먹을 만한 이 빵은 유구한 반죽 덕분에 발효와 부패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더이상 보장된 미래는 없다고, 더 많은 빵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오늘의 반죽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요
빵의 분배 역시 마찬가지, 파이를 나누는 일에 정해진 규칙이란 없습니다 나이프 쥔 사람 마음대로지요 그가 눈을 감은 채 칼을 휘두르지 않기만 바랄 수밖에요
빵에 갇힌 자로서 빵의 미래를 어찌 알겠습니까
눈앞의 빵조각에 몰입할 뿐 빵처럼 부드러운 제 살을 황홀하게 먹어 들어갈 뿐
계간 『창작과 비평』 2019년 여름호 발표
나희덕 시인 / 길고 좁은 방
이것은 무슨 냄새일까
무언가 덜 익은 냄새와 물러터진 과육의 냄새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나는 냄새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냄새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불안이 공기 속에서 몸을 섞는 냄새
책상에 머리를 묻고 있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묵은 종이처럼 자신에게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스며 있다는 것을
길고 좁은 방 옆에는 똑같은 크기의 길고 좁은 방들이 있지만 옆방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다 기침 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로 그 기척을 느낄 뿐
이 방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페인트칠로 덮여버린 못자국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길고 좁은 방은 표정을 지우고 서서히 사라지기에 좋은 구조다
먼지가 쌓여가는 책들과 바닥 위에 조금씩 늘어나는 얼룩들, 단단한 바닥재는 늪의 수면처럼 어룽거리는 무늬를 지녔다 각자의 흔들림을 감수하며 사람들은 이 늪에서 굳이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흔들림에 쉽게 익숙해지면 안 된다
흰 벽 위에 대여섯 개의 못을 박으려 한다 그림을 걸고 달력을 걸고 수건을 걸고 얼굴을 걸고 마음을 걸고 뭐라도 걸어야 뿌리내릴 수 있다는 듯이
매일 메일로 전송되는 공문들, 그 출력물이 길고 좁은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공기청정기는 쉴새없이 돌아간다 제가 빨아들이는 먼지와 냄새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이따금 깜박이며 위험신호를 보낸다
삶은 조금씩 얇아져가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 방에서 익혀가야 할 것은 사라짐의 기술
문밖에서 누군가 이 길고 좁은 방을 노크하고 있다
계간 『문학동네』 2019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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