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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명 시인 / 바위와 구름의 '듯'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9.

이진명 시인 / 바위와 구름의 '듯'

 

 

  암벽등반에 빠져

  바위에 올라 흰 구름 잡았던 얘기를 천하를 얻은 양 떠들었는데

  경청해주던 열다섯이나 아래인 젊고 예쁜 후배가

  잠잠히 전화기 무선에다 부어주는 선지덩이

 

  -떠가는 저 구름이

  바위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컹 넘어온 선지덩이

  바위에 올라 잡았던 흰 구름이

  지랄같이 지랄 같은 붉덩이로 엉겨

  무선의 고무다라 속에서 한바탕 요동을 친다

  요동 속 동시에 냉각의 빙화가 피고

 

  후배는 최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사실 나도 얼마 전 바위를 잃었다

  후배는 죽음이라는 파토였고

  나는 팀이 깨지는 인간관계 파토였다

 

  천하를 얻었던 사랑도

  천하를 얻었던 바위타기도

  다 ‘듯’ ‘듯’이 되고 말았다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아침이슬 같고

  꿈같다는 ‘듯’ ‘듯’

  옷을 다시 입어도 옷이 벗겨졌다

 

  전화기에 붙은 귀를

  바위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귀에 붙은 선지를

  구름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더러운 인간관계 슬픈 죽음이란 없습니다

  더러움이라는 흉내 슬픔이라는 시늉이

  바위와 구름의 ‘듯’으로 ‘듯’으로

 

  잠잠한 파토의 세계

  삼라를 태초부터 접수한

  잠잠한 파토의 세계는 언제나 선지덩이를 흘리고 있었던 것

 

 


 

이진명(李珍明)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0년 계간 《작가세계》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출판사 민음사에 근무하였으며 계간 《세계의 문학》편집 업무를 맡기도 했다. 시집에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세워진 사람』 이 있다. <일연문학상>, <서정시 문학작품상> 등 수상했고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한국문학예술위원회창작기금> 등의 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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