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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백겸 시인 / 거미줄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9.

김백겸 시인 / 거미줄

 

 

  거미가 몸에서 뽑은 지식으로 검은 글자의 책을 만들어 거미집을 세웠습니다

  거미 책 속에서 나는 마야영화에 출연한 아바타였습니다

  거미 책 속에서 시나리오의 각본대로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었습니다

  거미 책 속에서 삶과 죽음과 천국과 지옥이 집을 지었다가 무너졌습니다

  거미 책 속에서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생이 늙어갔습니디

  거미 책 속에서 나는 수혈을 기다리며 영생을 꿈꾸는 흰 종이 위의 검은 글자였습니디

 

  나는 관계의 그물위에서 웃는 거미

  여덟 개의 다리와 항문의 거미줄로 문화와 지식의 광장을 걸어가는 거미

  내 안의 여왕거미와 함께 거미줄 감옥에서 사는 거미

  학교를 가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해서 거미새끼를 두 마리나 낳은 거미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뇌가 아프도록 걸어 다니는 거미

은행과 병원과 이마트를 거쳐 베드타운인 아파트로 돌아오는 거미

  나는 뇌 안의 모든 지식을 황금으로 바꾸고자 하는 욕망의 거미

 

  거미집이 물고기를 디자인했습니다

  거미집이 양서류와 파충류를 디자인했습니다

  거미집이 인간을 다자인해서 알타미라 벽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거미집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와 황하에 사는 인간들이 도시와 신전을 세우게 했습니다

  거미집이 석가와 예수와 마호메트의 뇌를 크게 해서 종교적 환상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거미집이 새로운 지성체인 컴퓨터로봇들을 디자인해서 세상에 대한 권능을 주었습니다

  거미집이 직조하는 영원회귀의 입체영화는 스토리의 결말이 없습니다

 

 


 

 

김백겸(金伯謙) 시인

1953년 대전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데뷔했다. 대학에서 학생기자 활동을 하면서부터 문필활동도 시작. 학보사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1970년 초반 군사 정권에 대한 유신반대 데모에 휩쓸리는 등 불안정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나 세상에 대한 자유로운 인식을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시집으로『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북소리』,『비밀정원』이 있고 시론집으로는 『시적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기호의 고고학』 등이 있다.

2005년 시집 『비밀방』이 문예진흥원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고 그 밖에 〈대전시인협회상〉, 〈제1회 충남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현재 웹진 《시인광장》과 《시와표현》의 주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