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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끝별 시인 / 꽃이 피는 시간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9.

정끝별 시인 / 꽃이 피는 시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 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라남도 나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 1988년 '문학사상' 신인 발굴 시 부문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이 당선. 1994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으로 당선되어, 시작 활동과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이 있고, 시론,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시해설집 『시가 말을 걸어요』

 『행복』 『밥』 『한국애송시 100편──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가 있고, 산문집 『여운』 『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가 있다. <유심작품상>과 2008년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