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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우 시인 / 그 많은 밥의 비유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0.

김선우 시인 / 그 많은 밥의 비유

 

 

밥상 앞에서 내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 몸 속이 여전히 깜깜할지 어떨지

희부연 미명이라도 깊은 어딘가를 비춰줄지 어떨지

아, 입을 벌리는 순간 췌장 부근 어디거나 난소 어디께

광속으로 몇억년을 달려 막 내게 닿은 듯한

그런 빛이 구불텅한 창자의 구석진 그늘

부스스한 솜털들을 어루만져줄지 어떨지

 

먼 어둠 속을 오래 떠돌던 무엇인가

기어코 여기로 와 몸 받았듯이

아직도 이 별에서 태어나는 것들

소름끼치게 그리운 시방(十方)을 걸치고 있는 것

 

내 몸 속 어디에서 내가 나를 향해

아, 입 벌리네 자기 해골을 갈아만든 피리를 불면서

몸 사막을 건너는 순례자 같이

 

그대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가 아, 입 벌리네 어둠 깊으니 그 어둠 받아 먹네

공기 속에 살내음 가득해 아아, 입 벌리고 폭풍 속에서

비리디 비린 바람의 울혈을 받아 먹네

그대를 사랑하여 아, 아, 아, 나 자꾸 입 벌리네

 

 


 

김선우(金宣佑)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어른이 읽는 동화 『바리공주』.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