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실려가는 나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0.

나희덕 시인 / 실려가는 나무

 

 

  풀어헤친 머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한다

  또다른 생(生)에 이식되기 위해

  실려가는 나무,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언어의 도끼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이다

  오래 서 있던 몸에서는

  자꾸만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받아 적으며 따라가다가

  출근길을 놓치고 길가에 부려진 나는

  나무 심는 인부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무 모르게 그 나무를 따라간 것은

  덜컹덜컹 어디론가 실려가면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둔탁한 날이 스쳐간 자국,

  입술을 달싹이던 그 말들들 다시 읽을 수 없다

 

 


 

 

나희덕 시인 / 비에도 그림자가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선 문단에 나왔다. 작품으로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출간했다. 산문집 <반통의 물>이 있고, 옮긴 그림책으로 <조각이불>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