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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은영 시인 / 어울린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0.

진은영 시인 / 어울린다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과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이 솟아나는 저녁이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너에게는 빈 새장이 어울린다

피에 젖은 오후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이

 

계간 『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 발표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과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문학과지성사, 2017)와 그밖의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 『니체, 영원회귀로와 차이의 철학』(2007) 등의 철학하기와 관련한 저서 등이 있음.

2009년 제14회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2010년 제56회 현대문학상, 2013년 제15회 천상병 시문학상, 2013년 제2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 및 인문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