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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하얀 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0.

이규리 시인 / 하얀 새

 

 

1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만나는 일도

헤어지는 일

 

우리 서로

모르는 일

 

날아가는 새는

가는 곳을 말하지 않는다

 

2

 

올라가는 길엔

새의 울음

내려오는 길엔

잎사귀의 죽음

 

자꾸 집을 비우는 마음아

 

따라올 수도 없는 늦은 이별아

 

발은 날아가 버리고

빈 구두만 남아

 

슬픔은 끄트머리부터 말라갔다

 

3

 

날갯죽지 안에 남아있던 체온을

둥지에 놓고

 

새는 비로소 한 경계를 벗는다

 

우리가 그토록 머금었던 꿈도

부리가 찍은 흔적

 

떠나가는 꽃들은 무게를 다 버리고

 

젖은 날개를 털자

당신은 물기도 없이 흩어졌다

 

월간 『시인동네』 2019년 9월호 발표

 

 


 

 

이규리 시인 / 르네 마그리트의 연애

 

 

한낮의 연애는 캄캄했어요

왜 모든 연애는 숨는지요

비밀은 고단하였는데

 

생은 생이 아닌 힘으로 떠다니고

연애는 어떤 비참으로도 달라지지 않고

 

이유를 마련하곤 했지만

그것이 야유인 걸 모르지 않지요

 

환상을 덕지덕지 바르면 멀리 갈 수 있을까요

 

한낮의 연애는

발목을 벗어놓고 발을 더듬거나

눈동자를 찾아다니다가 눈을 빼버리곤 하지요

 

환한 해가 뜬 밤에 우리 남은 얼굴을 지워요

 

모든 연애는 비겁하였으니

모자를 열어 비둘기나 날려주면서

 

어느 낮은 갈등이 오고

어느 낮은 갈증이 와요

 

모포를 휘감고 대낮을 가는 미친 부끄러운 사랑아

 

부서져라 부서져라 간절한 문 앞에서

 

대낮이 흘리는 흰 피에서

후끈한 김이 올랐어요

자, 복면을 하고 우리 키스를 해요

이제 더 숨지 마요

 

격월간 『녹색평론』 2019년 3~4월호 발표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과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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