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허민 시인 / 시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1.

허민 시인 / 시월

 

 

  그때 막 시월이라는 열차가 들어온다

 

  도착하지 않기 위하여 출발하는

  화물칸의 모서리가 있다고

 

  그 모서리의 차가운 감정들이

  높은 산 캄캄하고 깊은 터널과 사랑에 빠진다고 치자

  낙엽이 수북한 레일이 덜컹덜컹 흔들리고

  오래 달릴수록 목적지에 닿는다는

  거침없는 착각도 하면서

 

  가을나무들은 소라껍데기처럼 여리고 단단히

  지금 저 대지의 저물어가는 바다 깊은 곳을 향해

  영영 도착하지 못할 회오리처럼

  닻을 올린다고 치자

  꽝꽝

  점점 단단해지는 맨땅에 구멍을 뚫고

  나사못처럼 타들어간다고

 

  그리하여 노랗고 붉은 불꽃들이 허공에 번쩍번쩍 튀어오르고

  점점 가을이라는 흔들림은 격렬해지고

  열차는 이제 막 귓가를 스쳐간다고 치자

 

  하얀 입김의 증기가

  칙칙폭폭

  나사못처럼

  시리디시린 스크류처럼

  네 달팽이관 속으로 긴 여행을 출발했다고 치자

 

  깊어지는 가을이라고 치자면

  끝없이 사라지는 것이어서

  나의 손가락은 허공을 미끄러지는 단풍잎처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다고 꿈꾸면서

 

  그렇게 가을이라는 열차의 밤은

  낮이라는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잠들지 못한 사랑이어서

  그렇게 반복할 뿐 끝내 없는 역들을 지나친다고 치자

 

  그렇게 약속했다 하자

  가을은

  시월이라는 몸짓은

 

 


 

 

허민 시인 / 지에게

 

 

  겨울엔 G와 농담을 한다, 밤새 음소거를 한 케이블 채널을 틀어놓고 수화기 너머 우리만 아는 은밀한 언어의 자세로. 복잡한 한낮을 잠시 밀어두고. 너는 가볍지, 행복하지 않니? G와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매일 밤 우리는 진지하게 농담을 했다. 때론 누워서. 때론 앉아서. 때론 아무런 형태도 없는 無의 자세로. 舞의 입술로. 어떻게 지만 생각하냐. 그러나 가끔 우리는 겨울의 백지 위에 쓴다. 어린 시절 국어사전에서 자지나 보지 따위를 찾아보던 비밀스런 호기심으로. 만지지 마, 지지야 아가, 그래, 알지, 먹었지? 그렇지! 눈 쌓인 너의 백지 위에 쓰는 것처럼. 번진다. 나는 지연이나 지혜라는 이름이 지겹구나. 그래서 너를 G라고 할게. 나는 너의 지, 땅과…에…또 뭐가 있을까? 그리고 나를 지워요. 잊어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 위 가장 무거운 흰 눈이 툭툭 떨어질 때 지구가 지고 하루해가 지고 네가 세상에 지고 내가 네게 질 때, 우리는 무게를 지우고 각자 매일 속이 쓰려. 지각하지 않기 위해 더 빠른 세상으로 지고 있는 짧은 해의 우리는 각자의 동지처럼. 지. 지에게. 나에게. 너에게. 뭉클한 행복이란 느낌. 눈물이 났다. 깍지를 낀 손가락으로. 가자, 지구로. 집으로. 각자의 지역으로. 지스팟으로. 했는지. 안했는지. 단지 나를 느꼈는지. 너를 찾았니? 우리를 지우는, 남은 건 오직 가벼운, 가여운 웃음뿐이었는지.

 

 


 

허민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