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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은 시인 / F 32*
난 양귀비꽃이 그려진 우산이 없어 나갈 수 없다 빨강색 여행 가방안엔 십센티미터가 넘는 구두가 가득하다 허정신과 약봉지, 빨간색 몇 겹의 밑줄, 수없이 찍힌 빨간점, 웃음치료=눈물치료 라 적힌 명함 한 장
“ 나야 ” 가 전화선을 자른다
1405호 나야의 달팽이 집은 틈을 내기 전 부서진다 ‘ 나야 ’ 의 얼굴 그림자 사이로 바람이 빠져 나간다 내 그림자, 허우적거린다 시간의 엔터키를 잃은 날엔 ‘ 나야 ’의 시간 속으로 끌려간다 열일곱 이후의 시간은 구석구석 여자를 숨기고 밤마다 허정신과 약을 털어넣게 만든다 ‘나야’의 구두 이십센티 높이, 뒷굽엔 양귀비가 그려져 있다 내 주름치마 안으로 들어간다 얼굴은 사라지고 목만 남는다 목만 남은 사진은 다음날 화장실에 붙는다 ‘나야’의 눈알이 여덟 개라는 걸, 눈 속 동공이 모두 빨강이라는 걸 아는 이는 나 밖에 없다 모자 속에서 난 나야가 하는 짓을 훔쳐본다 모자를 벗으면 눈이 멀어버려 볼 수 없다 나야는 눈알을 훔칠 필요가 없다 훔치다 흠씬 두들겨 맞아 죽는 날도 있다
‘나야’는 빨간루즈가 묻은 블라우스를 즐겨 입는다 누군가 얼룩이 묻었다고 손가락질 하자 그의 손가락을 잘라 화분에다 심는다 ‘나야’ 뒤뜰엔 손가락 화분이 수북하다 사람들은 얼룩이라고 말하지 빨간루즈라 말하지 않는다
‘나야’가 비로서 내가 되는날, 온몸에 돋아난 바늘이 몸을 찌른다 여행 가방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간다 ‘나야’의 말에 의하면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밤마다 종이를 잘라 믹서에 넣는다 책속의 사람들이 아우성이다 칼날에 어지럽다며 갸르륵 웃는다 내 시간은 늘 헐떡이다 울어버린다 꿈 속, 나야는 자궁속에 물고기를 키운다 밤이 되면 내 목을 통과해 바다로 돌아간다 그 자리, 여섯 살 작은 여자 아이 들어선다 바닷물색 낯빛을 한 그 아이, 울음 운다
난 나야의 시간을 쫓다 엔터키를 찾는다 가끔씩 양귀비그림 우산을 들고 내 꿈으로 오는 나야 꿈이 시작 된지 삼일 뒤 1405호의 나야는 미이라가 된 여섯 살 여자아이를 뱃속에 둔 채, 빠져 나왔다
나야 집 1405호 앞에 적힌 ‘달팽이집갈이 해요 Help ~ !"라는 메모 쪽지
* F32 우울증 에피소드(대인기피 동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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